한때 나였던 아이는 훗날 오만한 키를 가진 어른이 되어 살피듯 풍경을 대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소년기 내내 늘 풍경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풍경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야! 장관이구먼! 전망이 멋져!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_ 16~17쪽
내가 작은 소년이었을 때의 작은 기억들. 단지 그것을 기록한 것이다. _ 50쪽
카발레이루스 길의 집은 악몽에 시달렸던 시기와 관계가 깊다. 꼭대기 층에 있는 집까지 가려면 늘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 시절 나는 잠들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늘 악몽으로 괴로워했다. 밤이 당도하는 것만으로 공포는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몰려들고, 어느 구석에 자리 잡은 괴물 하나가 발톱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악마의 몸짓이 나를 공포의 늪으로 몰아넣곤 했다. _ 79쪽
밤이 이슥해졌고 방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살금살금 초콜릿 봉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세 걸음을 크게 걸으며 침대로 돌아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다디단 초콜릿 과자를 씹을 때는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까무룩 무의식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말았다. _ 105쪽
그즈음 어느 날에 마프라로 소풍을 갔다. 나는 시골 아지냐가에서 태어났지만 수도 리스본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50년 넘게 시간이 흐른 뒤에 작가로서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곳에 가게 되었다. 운명이 공모자로 적극 개입한 것인지, 당시로서는 아무도 해독할 수 없었던 운명의 눈짓이었는지 누가 알겠느냐마는. _ 108~109쪽
짐을 이고 지고 가던 어머니에게 자신의 과거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처녀적 어머니가 물을 길러 마을 분수에 갔다가 아버지가 사귀자고 한 말을 들은 뒤에 마음이 온통 어수선하고 요동치던 일이 있었다. 그날 물 항아리를 이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몸을 숙여야 한다는 것도 그만 잊고 말았다. 정신이 온통 딴 데 팔린 것이었다. 항아리와 상인방이 부딪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항아리 파편, 흩어진 물, 할머니의 야단, 아마도 사건의 원인을 알았다면 웃음. 내 인생도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서진 물 항아리와 함께. _ 168~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