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해달라는 것뿐. 이 말을 적고 나니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순간이 있다. 우리는 방금 자신이 말하거나 글로 쓴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오로지 그 말을 거둬들이거나 글자를 지우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라도. 그러나 침묵하고 싶다는 유혹이 온몸에 퍼진다, 신들처럼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는 것만 하고 싶다는 침묵의 매혹. _ 65쪽
내가 잠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꿈을 꾸기 위해서일세. 꿈을 꾸는 건 이곳에 부재하는 것, 이면에 가 있는 것이지. 하지만 인생에는 두 가지 면이 있어, 페소아, 적어도 두 가지일세, 그런데 우리가 삶의 이면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꿈뿐이지, 죽은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은 직접 경험한 바에 따라 삶의 이면에는 죽음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 글쎄, 난 죽음이 뭔지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삶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는지 별로 확신이 안 들어, 내 생각에 죽음은 그냥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하거든. 죽음은, 그것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럼 그냥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서로 다른가. 그래, 친애하는 헤이스, 그냥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다르네, 단순히 두 표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두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야지. _ 135쪽
히카르두 헤이스가 스페인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식사 때 들려온 손님들의 대화나 신문을 통해 접한 것이다. 반대파의 온상,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와 노조 운동가가 시작한 선전 활동, 그들의 선전은 노동계급으로 파고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육군과 해군의 군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히카르두 헤이스가 보안 경찰국에 소환된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_ 295쪽
우리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 우리에게 동무가 되어주는, 참을 만한 외로움. 그런 외로움이라 해도 때로는 참을 수 없어진다는 점을 자네도 인정해야 하네, 우리는 누군가의 존재, 목소리를 갈망하니까. 때로는 그 존재와 목소리가 외로움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네. _ 344쪽
선생님이 절망할 이유는 뭔가요. 딱 하나뿐입니다, 공허감. _ 376쪽
산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은 벽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은 벽만큼이나 불투명하다네. 이 말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위안이겠군. 꼭 그렇지는 않네, 죽음은 일종의 양심이거든,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사람 자신과 그 삶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판관일세. _ 417쪽
인간적인 불안은 무익하고, 신들은 현명하며 무심하고, 그들 위에 운명이 있지, 신들조차 복종해야 하는 최고의 질서. 그럼 인간은,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질서에 도전하고, 운명을 바꾸는 것. 좋은 쪽으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다를 게 없네, 중요한 건 운명이 운명이 되지 않게 하는 거야. _ 5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