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을의 모든 새벽마다 안개는 무진(霧津)의 바다로부터 육지로 상륙했다. 모든 아침들은 해가 떠오르기 전에 빛을 은폐하는 안개에 둘러싸였다. 안개는 모든 빛을 빛으로부터, 모든 사물을 사물로부터, 모든 풍경을 풍경으로부터 차단했다. 해가 아주 높이 솟아오르고 안개의 입자들이 하나하나 데워져 수증기로 휘발되기까지는 해조차도 제빛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날 새벽안개가 바다로부터 무진으로 상륙을 시작했을 때 그 남자는 어둠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팽개쳐져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 지상에서는 천적을 가지지 못한 희고 긴 털을 가진 난폭한 짐승처럼, 혹은 오래되고 버려진 식민지에 상륙하는 점령군처럼 산만하고 무례하게 밀려들었다. 그 하얀 털에 점령당하듯 길이 사라지고 건물이 숨을 죽이고 가로등 빛이 힘을 잃었다. 땅에 이어 하늘이 그 거대한 짐승에게 가려지고 나자 세상은 완벽하게 안개의 것이 되었다.
―14쪽 중에서
이나는 외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많았지만 쓸쓸하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외로움이 나이를 먹고 늙으면 쓸쓸함이 되는 걸까? 외로움이란 단어 말고 쓸쓸함이라는 단어에는 세월의 더께 같은 것, 오래되고 쿰쿰하고 약간은 궁상맞은 땀내 같은 것이 배어 있는 듯했다. 엄마는 오늘 밤, 쓸쓸하다고 생각할까. 늘 멀리 있던 딸이 이렇게 곁으로 다가와 거실 건너편 방에 누워 있어도?
이나는 어쨌든 엄마와 함께하는 이 지상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휴가를 좋은 기억으로 채우고 돌아가고 싶었다. 누운 채로 올려다보니 창밖으로 안개가 흰 블라인드처럼 빡빡이 서려 있었다. 아까 잠들 때는 분명 없던 안개였다. 창밖은 우유를 발라놓은 듯이 희뿌옜다. 그제서야 이나는 무진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성당의 종소리였다. 그리고 왜였을까. 이나는 설핏 잠든 엷은 꿈속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해리였다.
―27쪽 중에서
“날 덮치려고 했어, 그 새끼가! 술 처먹고 와서……. 어떻게 날!”
해리의 마주 잡은 두 손은 이제 핏기가 가실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녀의 오빠, 집을 나가 떠돌다가 아버지가 출타하면 귀신같이 그 틈을 타서 집에 들어와 해리를 때리고 돈을 빼앗아 간다는……. 그런데 이제 그 오빠라는 작자가 그녀를, 아, 하느님 맙소사! 이나는 그때 약간의 공포와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언제나 해리를 보고 있으면 그랬다. 해리 주변에서는 모든 상식이 힘을 잃었다. 해리 주변에는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었다. 날것, 혹은 정글……. 그것이 주는 공포 때문에 그녀를 떠나고 싶었지만 연민이 언제나 그것을 막았다. 아주 멀리 떠나지는 못하게 막았다. 아주 나중에 생각했는데 해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잘.
―36~37쪽 중에서
여자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이나는 자신이 그녀에게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잡는다는 그 지푸라기가 된 것을 알았다.
“도와주시소. 너무 힘이 들어 저도 우리 딸 따라 콱 죽어버리고 싶어예. ……죽기 전에 그놈을 잡아야 합니더. 슨생님, 도와주시소.”
“저기요…….”
이나는 잠시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려는 노력을 하다가 말았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본다고 나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백진우는 그녀에게 여전히 불길하고 어두운 동굴 깊숙한 곳에서 숨 쉬는 명사였던 것이다.
“제가 얼마나 도와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힘내세요. 제가 엄마 죽만 좀 가져다드리고 다시 올게요. 그만 우시고요.”
“미안합니더, 미안합니더……. 너무 서러분께 고만……. 꼭 약속 지키실 거지예?”
“예.”
그녀가 이나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움켜쥔 힘의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불러낸 백진우 신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이나는 그만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52~53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