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과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글을 쓰고 싶다는 건 단순한 표현 욕구를 반영한다. 하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건 평생 종사할 자신의 직업을 결정하는 일이다. ‘멋진 시를 한 편 써볼까’라거나 ‘재미있는 소설 한 편 써볼까’ 하는 일시적인 표현 욕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의미이다.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되는 이 지점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어정쩡하고 어설픈 태도를 보인다. 그로부터 시간과 열정을 비롯하여 많은 부수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 문제를 보다 분명하고 확고하게 해두지 않으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평생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낼 수 있다. 단순하게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가가 되겠다’는 뜻을 품은 사람들은 꽤 오래 견디며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목표가 글이 아니라 ‘소설가’이기 때문에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견디는 것이다.
―「지망생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중에서
당선 이후에 겪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려주거나 예시하지 않는다. 거기서부터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주변의 조언이 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다. 자신이 겪고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하는 한 어둠은 스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등단 직후에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많은 소설가 초년생들은 고뇌하고 막막해한다. 하지만 막막해하는 그 행위 속에는 아무런 길이 없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소설가의 길을 찾기 위해 소설가 지망생으로 살아오며 구축했던 모든 것들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을 새롭게 정리하고 정립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선 그 후, 낯선 어둠 속에서」 중에서
신춘문예 예심의 경우, 하루에 500~600편, 때로는 1천여 편에 가까운 소설을 심사해야 한다. 예심 위원은 아무리 많아도 4, 5명 정도이다. 예심 위원을 적게 배치하는 경우에는 두 명이 몇 백 편의 작품을 심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인당 100편 이상은 읽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심사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심사는 소설의 도입부에서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다. 즉 도입부의 몇 단락만 읽어보면 응모자의 현재 필력을 판단할 수 있다. 맞춤법, 띄어쓰기, 표현에 이르기까지 소설 문장은 아무리 손재주를 부려도 위장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심사 위원들은 도입부에서 신뢰감을 주면 계속 읽어나가고 도입부가 부실하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읽어나가지 않는다. 반드시 심사에 통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대면하기 위해 소설의 도입부는 특히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소설 작법: 소설은 ‘쓰는’ 게 아니고 ‘짓는’ 것이다」 중에서
문학을 살기 위해서는 온갖 문학적 포즈와 허세를 버려야 한다. 인생은 실질적인 행위와 구체적인 사고의 결과이니 문학을 살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영역을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 문학에 대한 치기와 낭만과 환상이 걷힌 자리,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문학의 본령은 시작된다. 소설가 생활 10년쯤 지나면 자기 문학의 현주소가 자각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거대한 현실로 다가와 깊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 소설가 생활 10년쯤 지난 뒤에는 자기 정비를 하고 다시 먼 길을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20년 고개를 넘고 30년 고개를 넘어 소설가로서의 평생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다.
―「영원히 탐구하고 갱신하는 직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