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교언영색(巧言令色), 아첨은 멀리하고 직언(直言)에만 귀 기울일 것 같은 세종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이었다. 아첨에 늘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이나 가족의 문제 앞에서는 세종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위인(偉人)’ 세종대왕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례는 계속된다.
세종 22년 2월 8일 양녕대군이 서울에 집을 짓자 대사헌 윤번과 사간원 지사 황수신이 궐문 앞에서 부당함을 상소했다. 그러나 우승지 조서강은 세종이 양녕대군 문제와 관련된 대간의 말은 전하지 말라고 했다며 상소문을 세종에게 계달하기 어렵다고 노골적으로 이들에게 말한다. 두 달 후인 4월 23일에는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건한 흥천사 재건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에 국고를 지원하겠다고 하자 승지들은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신들의 척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실록은 “조서강 등이 왕의 말을 출납하는 데 있어 아첨하고 뜻을 맞추어 조금도 비판적 의견을 내거나 말리지 않아서 임금(세종)이 부처를 높이는 행사를 이루게 되었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1장 다스리는 자, 언제나 살피고 주의하라: 달콤한 말 앞에서는 누구나 흔들린다」 중에서
최우는 장장 30년 동안 최고 권력의 자리를 지켰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특유의 문신(文臣) 포섭 전략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우는 확고한 용인(用人)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인재를 4단계로 나눴다.
첫째는 능문능리(能文能吏), 학문이나 문장에도 능하고 관리로서의 재능도 뛰어난 자다.
둘째는 문이불능리(文而不能吏), 학문이나 문장에는 능하지만 실무 능력이 떨어지는 자다.
셋째는 이이불능문(吏而不能文), 실무에는 능하나 학문 혹은 문장이 뒤떨어지는 자다.
넷째는 문이구불능(文吏俱不能), 문장이나 실무 모두 능하지 못한 자다.
이를 보아도 그가 문(文)을 이(吏)보다 앞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무신 정권이 문신을 우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이규보(李奎報)가 큰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좋은 인재 선발을 위한 인사권자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을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역사 속의 사건이 있다. 당쟁, 즉 당파에 따른 인재 천거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숙종 16년(1690년) 2월 25일 대사헌(大司憲) 이현석(李玄錫)이 올린 상소는 지인지감과 당쟁의 대립 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장 인재를 보는 눈을 밝히다: 인재 찾기와 그 어려움」 중에서
『논어』 에는 군자 혹은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내면과 외면의 가치를 아홉 가지로 압축해서 정리하고 있다. 앞서 본 항우를 이 아홉 가지 잣대에 비춰보면 그의 문제점이 훨씬 쉽게 드러난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아홉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볼 때는 밝음을 먼저 생각하고 들을 때는 귀 밝음을 먼저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함을 먼저 생각하며 몸가짐을 할 때는 공손함을 먼저 생각하며 말할 때는 진실함을 먼저 생각하며 섬길 때는 공경함을 먼저 생각하며 의심스러울 때는 물음을 먼저 생각하며 분할 때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며 얻음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계씨 10)
―「3장 천하의 흥망을 가르다: 세심한 시선과 한결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