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장포 마을에 이르렀다. 갈곶도라는 바위섬을 눈앞에 둔 이 마을은 거제 해금강, 혹은 소금강이라는 이름으로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다. 짙은 봄비 속에서도 유람선이 떠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비안개에 젖은 바다와 마을의 모습이 꿈결 같다.
길은 어느덧 14번 국도로 바뀐다. 학동, 구조라, 지세포와 같은 아름다운 포구들이 길 곁에 늘어선다. 처음 이 길과 조우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미련 없이 나는 내 마음을 이곳의 길과 바다에 주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들. 상처도 할큄도 없이 제자리에 서서 제 스스로의 모습이 빛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우리 곁에 말없이 머무르는 것들. 그러므로 그 바다가 지닌 수연한 아름다움은 내게 최상급의 찬사로 다가왔다.
―「동백숲 속에 숨은 선경: 지심도 가는 길」 중에서
뱃사람들 일은 독하게 하는데 목이 말라도 마실 물이 없어요. 그 사람들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 통영 사람들이거든요. 물 한잔 내놓을 뿐인데 너무 고마워해요. 물론 장삿속이 전혀 없지는 않아요. 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 와서 차를 마실 때도 있으니까요. 술요? 그 사람들 일이 너무 힘들어 술 못 해요. 다음 날 새벽이면 다시 멸치잡이에 나서야 하니까요.
얼핏 단정해버린 낮의 풍경들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삶이란 때로 상상력의 허름한 그물보다 훨씬 파릇한 그물을 펼 때가 있다. K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내게 이야기했다. 딸아이와 엄마가 지난주 다시 만났다고 했다. 삼 년 만의 만남인데 모녀는 한 사흘쯤 떨어졌다가 만난 사람처럼 금세 어울리더라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조금 서운하기도 했노라고. 엄마와 딸은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하고, 다음 날 쇼핑을 하며 딸아이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너무 행복해했노라고. 그래서 자신도 덩달아 행복했노라고…….
―「그곳에 이상한 힘이 있었다: 동해바다 정자항에서」 중에서
젊은 청년이 여자 친구로부터 장미 꽃바구니를 받는다는 것. 아름다운 일이었다. 나는 필경 꽃을 받게 된 이유까지 물었고 그는 정말 수줍게 ‘만난 지 50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꽃바구니에 꽂힌 장미의 수는 쉰 송이일 터였다. 세상에서 내가 본 두 번째로 아름다운 꽃바구니라고 했더니 그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래전, 나는 장항과 군산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을 타면서 이 두 도시에 사는 연인들은 서로 이별하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15분인 편도 뱃길을 바래다주며 헤어지기 싫어서 다시 돌아오는 배를 함께 타고, 막상 한쪽의 도착지에 이르면 또다시 헤어지기 싫어 맞은편의 항구로 함께 가고……. 그러다가 불빛들이 충분히 아름다운 마지막 배 시간에 이르러서야 연인을 내려놓고 혼자 돌아오는 시간, 연인이 사는 도시 쪽의 불빛을 보면 또 얼마나 아쉽고 가슴 설렐 것인지……. 그 두 도시의 연인들은 필경 이별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헤어지기 싫은 연인들의 항구: 충남 서천군 장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