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이제부터 엄마 집으로 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 수화기 저쪽에서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걸 보면 아빠는 아마 집필실 책상에 놓인 담배를 찾아 물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떠나고 난 후, 어쩌면 아빠는 “실은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딸을 보내는 연습을 매일 했었다”고 자신의 홈피에 글을 쓸지도 모른다. 엄마와 함께 살 때 엄마를 보내는 연습을 하지 않았던 것을 아빠는 오래도록 후회한 거 같았다. 물론 아빠 입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가 내게 엄마에 대해 말한 일은 거의 없었다. 엄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게는 처음부터 금기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알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빠는 엄마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 지독하게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어느 날 문득 어린 나를 붙들고 “위녕, 아빠는 너를 낳은 것은 절대로 후회해본 적이 없어”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빠가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날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고, 그러자 가슴이 콱 막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더 숨을 쉴 수가 없을 것만 같았었다.
—8쪽
사랑을 한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산 사람의 몫이니까. 산 사람은 키와 머리칼이 자라고 주름이 깊어지며 하루에 천개의 세포를 죽여 몸 밖으로 쏟아내고 쉴 새 없이 새 피를 만들어 혈관을 적신다. 집 안을 떠도는 먼지의 칠십 퍼센트는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온 죽은 세포라는 기사를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집 안의 먼지 하나도 예사로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제의 나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제의 나는 분명 오늘의 나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또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인 것이다. 이 이상한 논리의 뫼비우스 띠가 삶일까?
죽음만큼 안전한 것은 없다고 엄마는 말할지도 모른다. 열여덟 해를 사는 동안 나도 알게 된 것이 있다. 사랑은 불안하고 아픈 것이며 때로는 무한한 굴욕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나도 엄마의 피를 따라 살고 싶었다.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쇳물처럼 자신을 기꺼이 변화시키는 모험에 참여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 있고, 그것도 펄펄 살아 있는 열여덟이기 때문이다.
—53쪽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 엄마는…… 엄마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어.”
(……)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엄마가 엄마를 사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말을 듣고 나자 내게 다가온 의문은 그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엄마의 눈에는 얼핏 눈물이 고여 있었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의 손을 잡았다. 내 표정이 너무 심각했는지 엄마가 얼른 말을 돌렸다.
“아니, 그래서 지금도 불행한 건 아니야. 힘들 때 생각했었어. 이제껏 불행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과거의 불행 때문에 나의 오늘마저도 불행해진다면 그건 정말 내 책임이다…….”=
—95~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