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을 뒤바꿔버린 사건이나 시간들을 통틀어 떠올려보면 그때는 보지 못했던 징후들이 마치 영화의 티저 영상처럼 삶의 거리 여기저기에 깔려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갗에 닿는 바람결로 봄을 느끼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서 조그만 들꽃의 싹이 피어나고 뜻밖에도 양지쪽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난 걸 보게 되듯이. 몸이 봄을 느끼기 전에 봄의 징후들이 도착하듯이.
그 징후들이 가지고 온 사명의 기호가 해독되는 것은 이미 사건이 종료되고 나서이거나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삶의 비극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에 다시 돌아보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스포트라이트는 늘 우리가 그렇다고 믿었던 그곳 말고 엉뚱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 —1부 제 영혼이 밀랍처럼, 7장 중에서
“사랑했나보다. 아직도 사랑하고.”
내가 문득 웃자 안젤로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왜요? 사랑하니까 여기까지 찾아오고 사랑하니까 아직까지 기다리는 거겠죠. 내 마음이 아파요. 아무리 남이 보기에 하찮은 것이라 해도 사랑은 아픈 거잖아요.”
안젤로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서쪽 하늘 저쪽으로 천사의 깃털 같은 구름이 퍼져 있고 그 사이로 생채기처럼 노을이 빨갰다. 안젤로가 말한 사랑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내 마음은 소희를 보냈던 수도원의 다섯 번째 담벼락을 더듬고 있었다.
“어떤 이유든 사랑은 아프고, 그래서 하느님도 늘 아프세요. 하느님은 사랑하니까요. 난 노을을 보면 그게 상처 난 하느님의 섬세한 마음인 거 같아서 덩달아 마음이 아파요.”
그때 종이 울렸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1부 제 영혼이 밀랍처럼, 58장 중에서
“사랑하라, 요한. 사랑하라.”
목소리는 나의 단전(丹田) 깊숙한 곳으로부터 마음으로 울려 나왔다. 온몸으로 전율이 지나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것이 그분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그녀를 사랑하라는 그분의 허락이며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스물아홉 해를 살아와 이제는 내 피부처럼 변한 내 이성(理性)의 검은 옷이 확신을 막았고 나는 잠시 혼란 속에서 그 목소리를 의심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가 놀아도 좋다는 허락을 갑자기 받은 수험생처럼, 뜻밖의 휴가를 명령받은 군인처럼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되물었다. 방금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었다는 고백도 잊어버리고 나는 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십자가의 실루엣 뒤로 희뿌연 빛들이 어렸다. 귀가 멍멍했고 십자가를 제외한 모든 사물은 깊은 어둠 속에 잠겼는데 다시 소리가, 낮고 작고 인자한 소리가 내 마음으로 울렸다.
“내가 그녀를 네게 보냈다. 사랑하여라, 요한.”
—2부 빈 들에 나가 사랑을, 1장 중에서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속삭이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옥사덕이나 남미 로메로의 피살이나 유신 혹은 광주 학살 같은 것은 아직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죠. 이제 악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소리 없는 풀 모기처럼 우리를 각개격파하러 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의미입니다.”
—2부 빈 들에 나가 사랑을, 61장 중에서
“요한 수사님, 슬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고 싶지 않았다. 나도 어린아이처럼 담백해지는 듯했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토마스 수사님은 조용히 죽 그릇을 물렸다. 눈물을 닦지도 않고 내가 물었다.
“왜 돌아오셨습니까? 이 죽음과 고문의 땅에? 그리고 왜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잔인한 신을?”
나는 사춘기에 막 들어선 아이처럼 복받쳐 있었다. 토마스 수사님은 앙상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뜻밖에도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사랑했으니까요.”
얼핏 내가 숨을 멈추었던 것 같다. 당연하고 놀라운 대답이었다.
“그 질문을 맘에 담고 계셨군요? 저도 여러 번 제 자신에게 물었답니다. 왜냐고……. 때로는 나 자신이 바보 같고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죠. 사랑했으니까요. 하느님도 한국도.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아니니까요.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르는 거니까요.”
—3부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29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