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이란.
책을, 자르는 일이다.
싹둑 잘라서, 데이터로 컴퓨터에 저장한 후에는 폐지로 버린다. 그런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자기 손발이 잘려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_ 23~24쪽
커다란 날이 달린 레버를 들어올려 책등에 맞췄다. 그 순간 손이 떨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큰 저항감을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취기에 몸을 맡기고 레버를 꽉 눌렀다.
싹둑, 날이 책을 파고드는 순간, 아랫배에서 본의 아닌 욕정 비슷한 열기가 끓어올랐다. 새끼 고양이나 갓난아이가 너무 귀여워 골려주고 싶을 때 같은 뒤틀린 애정에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
어이없고 황홀하리만큼 깔끔하게 책등이 떨어져나갔다. 조심스럽게 들어보니, 책은 낱낱이 흩어진 종이 다발이 되어 있었다. _ 30쪽
“……시바타 씨.”
“응?”
“저, 키스 마크 생기겠어요.”
“괜찮아. 뭐, 어때.”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나랑 하고 싶어?” _ 48~49쪽
“교수님. 저,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가 순간적으로 동정하는 눈빛을 보이고는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전에 상담했던, 담당 편집자를 찌르려고 했어요.”
“찌르려고 했다? 어떻게?”
“파티장에 있는 포크로. 전혀 다치지도 않았고, 일이 크게 확대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말은, 일이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면 화해하고 끝냈다는 뜻인가?”
“시바타 씨와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쪽 회사 사람들이 찾아와서, 두 번 다시 시바타 씨를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_ 120쪽
오늘부터 자유다, 하고 생각했더니 유난히 후련했다. 상처 입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전부 경험했던 일이니까. _ 169쪽
그 비 내리던 밤, 연기가 자욱한 가게 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듣는 음악, 손에 닿는 것 모두가 오직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전원이 되고 말았다. _ 217쪽
이 사람은 여기 있다.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자유롭게.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는 지금이 아니다. _ 2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