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 법
마녀사냥이 처음 시작된 14~15세기에는 백년전쟁, 페스트, 대기근으로 유럽 전체가 심각한 몰락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주의할 것은 이 시기가 중세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중세의 한가운데에 기독교 신앙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서 마녀사냥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세기로 불리는 근대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이런 비이성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황이 마녀사냥을 승인하고 교회가 종교재판에 적극 나선 것도 종교권력의 강화를 통해 권력 누수를 막으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즉, 마녀사냥은 사회의 내부적인 불안과 불만을 악마나 마녀와 같은 외부 세력의 탓으로 돌려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유지하려는 얄팍한 정치적 의도, 그리고 사회 주도권 변화에 저항하는 구세력의 몸부림이 중첩되어 벌어진 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왜 ‘마녀’ 그러니까 ‘여성’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 악마 혹은 마법사로 몰려 남성이 처벌받은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피해자의 다수는 압도적으로 여성들이었습니다.
— <1-4 신의 이름을 빙자한 사회적 폭력, 마녀재판> 중에서
법은 양날의 검, 부메랑과 같은 것입니다. 통치의 효율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진 공동체에서는 필연적으로 등장하지만, 법이 지닌 보편성 때문에 정작 그 법으로 통치를 하려고 하는 지배 계급의 권력도 제한하는 효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강제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 권력을 지닌 집단이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만 활용하면 ‘권력 제한’이라는 속성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이럴 경우 법이 통치의 수단이 되었지만 결국 소수 통치자의 의지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이 좌우되므로 ‘사람의 의지에 따른 통치’라는 의미에서 ‘인치(人治)’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즉, 법치란 단순히 법으로 하는 통치가 아니라 법의 보편적 원칙에 따라 권력이 제한되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체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여러 법 위에 존재하는 법, 그래서 법을 통해 행사되는 다양한 권력들을 한꺼번에 제한
하는 힘을 갖도록 새로이 만든 최고의 법을 헌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입헌주의란 단순히 헌법이 있고 없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통해 권력이 제한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권리와 행복이 보장되는 정치 체제, 즉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 <2-1 헌법의 뿌리, 마그나 카르타> 중에서
형법의 방향성은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형법에서 인권 보호를 이야기하는 것은 피해자 보호보다는 형사 절차에서 국가에 의해 인권을 침해당하기 쉬운 피의자의 권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인권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나쁜 놈들의 편을 들어준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처벌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지요. 다시 말해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도록 하려다 보니 열 명의 범인을 놓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생기더라도 열 명의 범인을 잡아넣어야 한다’는 원칙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압박과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방식으로 수사를 한 데에는 이런 가치관이 깔려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그래, 가끔 희생자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억울한 희생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과연 내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서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받아들이자’ 하고 생각할까요?
- <3-3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중에서
2019년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3.1운동은 시민들의 힘으로 제국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시민사회의 등장을 알린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운동보다 한 달 정도 앞선 2월 8일, 일본의 도쿄에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엄혹한 시대에 제국주의의 수도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이후 3.1운동에도 힘을 더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선언을 주도한 학생들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관련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여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판사들이 일본제국에 저항한 식민지의 젊은이들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이들의 곁을 지킨 변호사는 기가 죽어 용서를 빌기는커녕 학생들 못지않은 큰소리로 질타를 가했습니다. “재판관은 조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조선 독립은 정당한 요구이며,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변호사가 일본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빼앗긴 지 1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그 심장부인 일본의 법정에서, 판검사와 경찰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조선의 독립이 정당한 요구라고 공공연히 선언한다는 것은 변호사 자신이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과감한 주장이었습니다.
— <4-3 양심의 이름으로 민중의 편에 서다> 중에서
1884년 선장인 더들리와 항해사 스티븐스, 선원인 브룩스, 심부름을 하던 파커, 이렇게 네 사람이 탄배는 호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침몰했습니다.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트 안에는 먹을 것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선장은 제비뽑기를 하자고 했지만 브룩스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을 버틴 끝에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마신 파커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 희생자로 삼기로 합의하고, 파커를 살해해서
갈증과 허기를 채웠습니다. 다행히 비극이 있고 나서 나흘 뒤 남은 세 사람은 지나가던 독일 배에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더들리 선장은 식인 행위가 남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일이었고, 선원들 사이에 관행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사건의 전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그의 예상과 달리 영국 정부는 살아남은 세 사람을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도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 <5-2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해쳐도 될까?> 중에서
우리는 흔히 ‘죄를 지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법률상으로 엄격히 따지자면 범죄는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이며 이에 대해 국가가 가하는 제재를 ‘처벌’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국가가 개인을 처벌하는 형벌권은 매우 강력한 권한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과도한 처벌을 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형법에서는 어떤 것이 범죄인지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조건을 달아 국가가 형벌권을 남용하는 일을 막고 있습니다.
마치 깔때기로 하나하나 걸러내는 것처럼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범죄인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구성요건 해당성, 위법성, 책임성이 그 세 가지 단계입니다.
책임성 조각 사유 중 대표적인 것이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 머리에 총을 겨누고 위협하면서 친구를 때리라고 강요했다면 분명히 폭행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행위이므로 때린 사람을 범죄로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범죄의 조건을 아이히만의 사례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는 분명히 유대인을 학살하는 범죄 행위에 가담했기 때문에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고,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는 위법성이 조각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군인의 신분으로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직접 사람을 죽인 일은 없고 단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과연 군인의 신분으로, 더구나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장교가 명령의 잘잘못을 따져가며 저항하고 심지어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 <5-3 국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 죄인가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