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지금도 혐오 표현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일상에서 혐오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방과 후 고등학생 두 명이 길을 가다 나누는 대화를 보자.
“우리 반에 걔 있잖아. 아주 이상해. 같은 반에 있다는 게 기분 나빠…….”
“그래. 걔 ( )잖아. ( ).”
위 대화에서 ( )에 들어갈 수 있는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한 혐오 표현은 다양하다. 우리 모두 이 ( )에 들어갈 수 있는 무수히 많은 표현을 알고 있는 자신에게 놀랄 것이다. (중략)
한순간에 무심코 사용한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에는 이미 두 가지 생각이 담겨 있다. 하나는 표현의 대상이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거나 소외당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표현으로 그 사람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가 어려움을 호소하는 인터넷 기사에, “자살을 추천한다”라는 혐오 표현 댓글이 달리는 경우를 보자. 이 혐오 표현을 단 사람은 ‘장난’ 혹은 ‘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죽음을 결심할 수 있다. 이때 죽음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을까?
— <1장 정체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만들어내는 불평등> 중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대응되는 말로, 일정 기간 계약을 맺고 노동을 제공하는 고용 형태를 말한다. 아르바이트도 해당되지만 일정 시간만 일하는 파트타임 노동이나 일정 기간만 일하는 기간제 노동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비정규직 노동의 경우, 노동을 제공하는 회사에 직접 고용되지 않고 외주 회사에 고용되어 파견직으로 일하는 하청 노동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
하청 노동은 특정 노동에 대해 회사가 직접 고용한 직원들이 아니라 외주 회사에서 고용한 직원을 파견 보내 수행하는 형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하청 노동은 대부분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3D(dirty, difficult, dangerous) 노동이 많으며 임금도 낮은 편이다.(중략)
이렇게 위험한 업무를 주로 하청 노동자, 즉 파견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맡기는 현상을 ‘위험의 외주화’라고 한다. 과거 노예 제도와 달리 임금을 준다는 점에서 노예는 아니지만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면에서 과거 노예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인간을 상품으로 여기고 대가 없이 노동을 제공하도록 했던 과거 노예 제도의 모습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위험의 외주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 <2장 세계사에 얼룩진 차별과 투쟁의 시간들> 중에서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법은 또 있었다. 2016년에 개봉한 <러빙>은 「인종순결법(Racial Integrity Law)」에 대한 위헌판결(1967년 6월 12일)을 다룬 영화이다. 백인과 흑인의 피가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백인과 유색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한 「인종순결법」이 남아 있던 1958년 버지니아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백인인 리처드 러빙은 미국의 수도였던 워싱턴 D.C.에서 고향 친구였던 흑인 여성 밀드레드와 결혼한다. 그리고 아내가 임신을 하자 이들은 함께 고향인 버지니아주로 돌아온다. 고향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웃의 제보로 이들 부부는 「인종순결법」을 어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다.
1심에서 실형을 받은 부부는 항소를 했지만, 버지니아주를 떠나 25년간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풀려난다. 이때 재판부는 “전지전능한 신은 백인과 흑인, 황인, 말레이인, 홍인을 창조하고 각기 다른 대륙에 배치했다. 신이 인종을 분리한 것은 인종을 섞을 의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판결문에 밝혔다.
— <2장 세계사에 얼룩진 차별과 투쟁의 시간들> 중에서
대부분의 범죄에서는 가해자를 비난한다. 그런데 유독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네가 그때 좀 조심하지”라거나, “당할 만한 일을 했으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라는 발언 이 대표적인 2차 가해이다. 성폭력 상황에 대하여 캐묻거나 개인 정보를 캐내는 것도 2차 가해 행위에 속한다.
2차 가해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미투’는 자신의 영혼까지 파괴되는 폭력에서 생존한 자신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일이다. ‘위드유’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당신의 행동을 지지하고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렇게 성폭력에서 같이 생존한 사람들이 미투를 주장하고, 남녀 불문하고 위드유를 통해 그들의 용기를 지지할 수 있을 때, 남녀 모두 건강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확립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성적 매력을 상대방에게 발휘하고 친밀한 접촉을 하는 것은 삶의 한 부분에서 매우 중요하다. 남자와 여자가 한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그리고 상호 간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성적 친밀성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미투 운동이 진정 지향하는 것이다.
— <3장 성별을 둘러싼 불평등 이해하기> 중에서
‘꼰대’는 권위적인 사고를 하는 어른을 이르는 표현이다. 나이 든 세대와는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부정적 의미를 담아서 사용한다. 젊은 세대는 노인 세대에 대하여 “기본적인 사회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들 편한 대로 하면서 말도 안 통한다”라며, 말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그냥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이 든 세대도 마찬가지로 “쯔쯔쯔…… 요즘 것들은……”이라며 젊은 세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과의 소통이 어렵다는 표현을 동굴 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니 사실 세대 간 소통은 어느 시공간에서나 힘든 문제이다. 평균 기대수명이 30세 정도였던 시기에도 세대 간 소통의 갈등이 있었는데, 기대수명이 80세를 넘어 100세를 바라보는 요즘 세대 간 소통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 <4장 일상 속 사회적 차별의 다양한 모습들> 중에서
최근에도 이주민이나 노인 분장을 하고 1년 가까이 살아보거나 장애인 체험으로 그들이 어떤 불편이나 차별을 받는지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타인의 삶을 모두 체험할 필요는 없다. 그 위치에 서보는 상상 경험만으로도 가능하고, 내가 피해자가 되어 고통받았던 경험을 떠올려 봐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을 통해,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비합리성을 판단해 보는 것이다. 더불어 편견과 차별, 그리고 혐오 표현을 당한 대상의 고통에 감정이입해 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생각의 무능함에 서 벗어날 수 있다.
더 나아가 특정 집단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 스스로 방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나는 차별이나 혐오를 하지 않았으니 문제없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도 생각의 무능함이다. 그런 생각을 하 는 순간 이미 편견과 차별, 혐오 표현을 용인하는 것이다.
— <5장 모두가 존엄한 세상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