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라는 게 자꾸자꾸 커지고 넓어지는 가방 같아”
“마지막이야, 지금 타지 않으면…….”
이미 내린 결단을 그는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인이 되고 이 년 동안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하던 대로 했고, 나는 하던 대로 하지 않았다. 그가 내린 크고 작은 결정들을 단번에 지워버린 단 한 번의 결정. 집착이 미련으로 바뀌는 것은 늦게 깨달은 자의 불행이다. 나는 조수석 차문을 힘껏 닫고 먼저 걸음을 뗐다.
<1-1 풍차를 향하여> 중에서
정목은 가방 대신 공주들이 모여 사는 장난감 성을 선물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왜 꼭 가방을 원해?”
대답 대신 두 번 다르게 되물었다.
“숨기기 좋잖아요?”
“꺼내기 좋잖아요?”
정목이 고쳐 물었다.
“어느 쪽이야? 숨기는 거? 꺼내는 거?”
쉽게 이어버렸다.
“숨겼다가 꺼내기 좋고 꺼냈다가 숨기기 좋고. 그게 가방이니까요.”
정목이 질문을 더했다.
“뭘 숨기고 또 뭘 꺼낼 건데?”
나는 몇 가지를 떠올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형숙 씨를 흉내 냈다.
“마음! 마음을 숨기기도 하고 꺼내기도 할래요.”
<1-3 자작나무처럼 기다리는 남자> 중에서
이제 더는 동아리 안에서 연극을 전부라고 믿던 대학생이 아니었다. 연극이 소중한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세상에는 많았다. 예술을 예술답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귀 막고 눈 막으며 연극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 서자마자, 영화도 드라마도 노래도 아니라는 생각이 기차처럼 줄줄이 따라왔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어려서부터 이상하리만큼 친숙했지만 아직 시도해 보진 않은 그 꿈이,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역처럼 떠올랐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일. 예술은 아니지만 예술적인 일!
<1-7 그레이스는 오리지널이죠!> 중에서
‘트로이’란 이름은 비컨으로부터 나왔다. 비컨이 그 이름을 제안한 것은 아니다. 내가 프로젝트를 처음 설명했을 때, 방 이사도 채 팀장도 페인터 눈도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직은 국내 시장 확충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컨은 해외 매장을 내는 것은 시기상조지만, 인터넷을 통해 업무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이 프로젝트는 못할 것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성선설과 성악설의 오랜 대립까지 끄집어내며 제품을 다시 만드는 횟수를 무한정으로 두지 말고 다섯 번으로 끊자고 했다.
“성선설을 믿는 겁니까? 백을 하나 만들었다 칩시다. 단번에 만족한다 해도 순순히 속마음을 털어놓겠어요? 거기서 끝내면 백 하나에 이십억 원을 지불한 셈인데……. 나 같으면 적어도 다섯 번은 이것저것 요구하겠습니다.”
제한을 두지 않으면, 이 프로젝트가 ‘트로이의 목마’처럼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트로이’라는 단어만 낚아챘고, 횟수 제한을 두지 않는 원안을 밀어붙였다.
“성선설을 믿지도 않고 성악설을 믿지도 않아요. 다만 자존심을 믿죠.”
<2-2 믿니?> 중에서
“내게 가방 스무 개가 있다고 쳐. 나는 그것들을 내 방에 가득 펼쳐놓지. 가방 속에 가방을 넣는 건 상상도 못해. 가방과 가방을 붙여두지도 않는다고. 그렇게 둬야 가방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하고 떠돌기도 하고 또다시 가방으로 들어가기도 해. 모양과 크기가 다른 가방을 갖는 이유는 다른 물건과 다른 이야기를 넣고 다니며 또 간혹 서로 얼마나 다른지 꺼내 비교해 보기 위해서지, 다른 가방을 겹겹이 넣으라는 게 아냐. 가방이 비었다고 거기에 다른 가방을 집어넣고, 또 거기에 또다른 가방을 집어넣는 건 가방 학대야.”
<2-6 평온한가요 놀라운가요> 중에서
아틀리에 의자에 앉으면 자는 줄도 모르고 잠든다. 청혼 가방을 만들어달라는 아서의 메일이 도착한 일요일 오후도 그랬다. 메일을 읽기 시작할 때는, 완독하자마자 6인회 멤버들에게 공유한 후 회의를 소집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회의는 자정에야 겨우 열렸다. 이렇게 늦어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쏟아지는 잠, 또 하나는 눈물!
<2-8 여파 혹은 재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