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마음을 숨기고 있어 그 속을 헤아릴[測度] 길이 없으며 사람의 좋고 나쁜 점[美惡]은 모두 그 마음 안에 있어 그 얼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방법[一]으로 그것을 알아내고자 한다면 예가 아니고서 무엇으로 할 수 있으랴!
자신이 먼저 예를 배워서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비례, 무례, 결례(缺禮), 실례(失禮) 등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다.『논어』 ‘태백 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단순히 예를 갖추라는 도덕 명령이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비결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無禮] 수고롭고, 삼가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위아래 없이 문란해질 수 있고,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 임금이 친족들에게 돈독히 하면 곧 백성들 사이에서 어진 마음과 행동이 자연스레 생겨나고, 또 (새로 등극한) 임금이 옛 구, 즉 선왕의 옛 신하들을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은 구차한 짓을 하지 않는다[不偸=不苟].”
여기서 무례란 예를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예의 자리에 다시 사리분별 혹은 현실감을 집어넣어 해석해 보면 그 뜻은 훨씬 명확하게 드러난다. 때와 장소를 제대로 가려가며 공손하고 조심하고 용맹하고 곧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공손, 조심, 용맹, 곧음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상황에 맞게 행동을 하는지[隨時處變]를 보고서 판단할 때 사이비(似而非)가 아닌, 진짜 그 사람의 진면목을 꿰뚫게 되는 것이다.
― <말의 유려함이 아닌 행동의 마땅함을 보라> 중에서
진복창의 권력욕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당시 병조판서 이준경은 윤원형도 함부로 못할 만큼 내외의 큰 신망을 얻는 인물이었다. 마침 사는 집도 가까워 진복창은 이준경과 친해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번은 이준경의 친척인 이사증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복창이 이준경의 곁에 앉게 되었다. 이때 진복창은 술에 취해 이준경에게 “왜 구수담이 나를 저버렸는가?”라며 원망의 말을 했다. 이준경과 구수담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이날 잔치에 구수담의 며느리 집 여종이 일을 거들기 위해 왔다가 진복창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구수담에게 전하였다. 이에 구수담은 “조만간 나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걱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구수담은 진복창의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중략)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과(過)도 구차함이다. 과공비례(過恭非禮)가 전형적이다. 사림의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진복창의 공작에 의해 화를 입게 되자 홍문관 직제학 홍담을 비롯한 뜻 있는 젊은 신료들이 들고일어났다. 이것이 계기가 돼 그동안 진복창의 손발 노릇을 하던 사헌부, 사간원까지도 돌아섰고 조정 대신도 진복창을 멀리 내쳐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해서 올렸다. (증략) 현실 정치가이기도 했던 윤원형은 진복창을 더 이상 보호하다가는 화가 자신과 누님 문정왕후에게도 미칠 것을 예감하고 진복창을 삼수로 유배 보냈다.
― <그저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비루하게 살 것인가?> 중에서
이방원의 말은 적중했다. 만약에 최영(崔瑩)이 회군 소식을 보고받고 즉각 한씨와 강씨 등을 붙잡아 인질로 삼았다면 이성계의 회군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반면 그에 앞서 즉각 친어머니와 계모 및 가족을 이끌고 피신시킨 이방원의 이 행동은 일을 아는[知事]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조치다. 그 이방원은 최영을 일에 밝지 못한 사람[不曉事之人=不睿之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이방원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다시『중용』제31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직 천하제일의 빼어난 임금만이 능히 애씀의 이치를 샅샅이 살피고 꿰뚫어 보아[文理密察] 족히 분별력[別=辨]이 있게 된다.
문리(文理)는 흔히 말하듯 글의 이치가 아니다. 어떤 일을 성공시키려고 열렬하게 애쓰는 것을 말한다. 분별 혹은 분별력은 그런 이치를 밀찰(密察)하는 데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대충대충 듬성듬성 보아서는 분별이 생겨날 수가 없다. 사리분별(事理分別)이라고 할 때의 분별은 이런 뜻이다.
― <리더는 일을 통해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중에서
중종과 명종 때면 적어도 사대부들 사이에는 성리학이 극성기를 이루던 때였다. 목천(木川) 상씨(尙氏)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 상진(尙震)은 아버지가 종6품 찰방이었던 한미한 집안 출
신이었다. 기묘사화가 터지기 전 사마시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동료들이 유난히 선비 정신 운운하며 위선을 부리자 상진은 오히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몽니를 부린 듯하다. (중략) 얼마 후에 문과에 급제해 당대의 명재상 정광필(鄭光弼)을 찾아가 인사를 했는데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뛰어났던 정광필은 그를 보고서 주변 사람들에게 “게으른 정승감이 나왔다”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성품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정승 상진은 인품과 도량이 넓고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대동기문』이라는 야사에 전하는 그의 일화도 이수광의 평과 일맥상통한다.
어떤 사람이 다리 하나가 짧아서 절뚝거렸는데 사람들은 혹 그를 가리켜 절름발이라고 했다.
그러나 공은 말했다. “짧은 다리는 딴 사람과 같으나 한 다리가 길다고 하라.” 평생에 남의 단처(短處)를 말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상진은 예, 즉 사리를 아는 사람이었기에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 몸이나 지키려는 보신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겸손하되 당당한 현실주의자였다고 봐야 한다. 두루 요직을 거친 상진은 이조, 병조 판서를 거쳐 1551년(명종 6년)에 마침내 좌의정에 올랐다.
― <사람 사이에 가고 오는 것을 중요히 여겨라> 중에서
유붕자원방래란 말은 결국 신하들 중에 신뢰하며 뜻을 같이하는 신하가 있는데 먼 곳에, 즉 군주 주변의 사사로운 측근이나 근신이나 후궁들이 늘 해대는 익숙한 세계[近]에서 벗어난 곳에 가서 공정하고 비판적이고 때로는 귀에 거슬릴 수도 있는 불편하지만 곧은 이야기들을 듣고서 바야흐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건 그런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군주로서 불편한 정도를 넘어 불쾌하고 크게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신뢰를 공유하고 뜻을 같이한다 해도 신하의 입장에서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그것은 온전히 군주의 마음 자세에 달렸다. 겉으로만 즐거워해서도 신하는 입을 떼기 어렵다. 진실로[亦] 그러할 때라야 신하는 조심스럽게 군주의 허
물들을 피하지 않고 전달할 수가 있다. 눈 밝은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고대 중국으로부터 우리 조선 시대까지 면면하게 이어진 언관(言官)의 간쟁(諫爭) 정신은 바로 이 같은 임금의 열린 마음이 전제될 때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다.
― <신뢰를 얻지 못한 간언은 비방이다> 중에서
『논어』에는 곧음[直]의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도 있지만 문장이나 문맥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것도 많다.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곧음이 바로 일의 이치[事理]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냥 정직이나 직언이라고 할 때의 곧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이게 해주는 것은 곧음이다. 곧음이 없는 삶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곧음은 곧 위선(僞善)을 물리치는 것이다. 위선은 결국 남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지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문 편’의 대화는 사리에서 행동의 지침으로까지 나아간다.
어떤 이가 물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러면 덕은 무엇으로 갚을 텐가? 원한은 곧음[直]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
그것은 곧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스스로의 원칙에 입각해 덕(德)을 기르고 마땅함[義]에 따라 행동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의 첫머리에 학이시습(學而時習),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와 더불어 다음의 유명한 구절이 3대 강령의 하나로 나란히 배치돼 있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으로조차 서운해하지 않을 때라야 진정 군자가 아니겠는가?”
― <곧음은 난세를 잘 살아내는 일의 이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