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처럼 고양이처럼 소나무처럼 후투티처럼 낮달맞이꽃처럼
내 문장으로 춤추련다
강가에서 만나는 풍경이 그냥 풍경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 약한 것, 어린 것에도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이야기를 발견하고 상상하면서 한 수 배운다.
제대로 공들여 발견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진 대신 그림을 권하는 이들도 있다. 손재주가 없는 나는 그리진 못하지만, 나무든 풀이든 고양이든 혹은 강아지 똥이든 수달 똥이든, 그 앞에서 짧게는 10분 길게는 한두 시간씩 에버노트에 끼적거린다.
― <1월 ‘당신은 누구에게서 배웠나’> 중에서
집필실을 나서면 야외다. 들 야(野) 바깥 외(外).
오전 집필을 마친 뒤에는 야외가 훨씬 더 넓어진다. 산과 들과 강 어디로도 갈 수 있다. 그때 그 산길과 들길과 강길은 통로가 아니다. 길과 거기에 연결된 자연이 내가 만날 대상이자 목적이다. 바깥의 활동을 통로로 축소하며 사는 것이 서울로 대표되는 대도시의 일상이라면, 바깥의 활동이 야외가 되어 밖의 밖까지 자유롭게 뻗어가는 것이 곡성을 비롯한 농촌의 일상이다.
통로를 지나치지 않고 야외를 만나 사귀어야 하니 걸음이 더디다. 그렇게 걸어선 운동이 안 된다고 타박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진정한 만보인(漫步人)이 되는 이유다.
― <2월 ‘만보인’> 중에서
밭에서 시금치를 솎았다. 씨를 너무 많이 뿌린 탓이다. 충분한 간격을 두지 않으면, 시금치는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고, 좁은 틈에서 힘겹게 경쟁하다가 시든다. 솎을 때 드러나는 흙들을 보며, 소설의 의도된 여백이랄까, 독자를 위해 만든 여유로움을 떠올렸다.
시금치와 시금치 사이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거기 흙이 있다. 시금치의 뿌리가 흙을 파고든다. 그렇게 파고들어야만, 시금치는 힘을 길러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독자도 상상력의 뿌리를 맘껏 내려야 한다. 단어와 문장과 문단에 대한 작가의 집착과 욕심이 독자를 틀에 가둬 자유를 빼앗을 때도 있다.
― <3월 ‘솎다’> 중에서
새로 나온 잎의 푸른빛 아래 한참을 서 있었다.
집필실에 앉자마자 쓸 문장이 떠올랐지만, 서두르지 않고 두 글자를 읊조렸다.
“차차.”
그래, 차차 쓰면, 살면, 걸으면, 만나면 될 일이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그 뒷날이라도. 이번에 얻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그 자리에 닿지 않더라도. 저 나무들처럼 그래, 차차.
― <4월 ‘차차’> 중에서
손가락 열 개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 소설을 쓰면서부터는 엄지와 검지만으로 두세 시간 집중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끔 펜을 쥐고 끼적이기라도 하면 예전의 내 필체가 아니라서 당황스러웠다.
오늘 모를 심노라니, 모를 쥐고 논바닥에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 긴 소설은 아니고 한 줄로 완성되는 하이쿠 같다고나 할까. 백 개를 심으면 백 개가 다 다른데, 옆에 선 사람이 심은 것과 비교하면, 내가 심은 모들끼리 엇비슷한 구석이 또 있었다.
― <6월 ‘엄지와 검지의 일’> 중에서
뜻밖의 순간에 뜻밖의 죽음과 만난다.
사흘에 한 번 꼴로 참새들의 사체를 본다. 날개가 찢기거나 다리가 꺾이거나 머리와 몸통이 나뉜 경우도 있다. 집필실 앞마당에 사는 고양이 도담이 짓이다. 또 다른 고양이 큰품이는 새를 잡을 마음이 없지만, 도담이는 시시때때로 사냥을 즐긴다. 쥐나 두더쥐는 그렇다 치더라도, 날아다니는 참새를 뛰어올라 입에 물고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집필실 앞에 놓아둔 적이 여러 번이다.
참새뿐만이 아니다. 작은 뱀들, 개구리와 두꺼비, 까치나 제비들도 툭툭 죽어 있다. 벌레들의 죽음까지 열거하면 끝이 없다. 어제까진 죽음의 기운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거기에 죽어 있다. 사람의 개입 없이, 생태계의 질서에 따라 먹고 먹히며 죽고 사는 것이다.
― <8월 ‘천지불인(天地不仁)’> 중에서
집필실을 옮기고선 자주 길을 잃는다.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걷다가 조금만 호기심을 따르노라면 낯선 풍경과 맞닥뜨린다. 길을 확인하는 손쉬운 방법은 모바일로 지도를 보는 것이지만, 일부러 지도 없이 내 기억과 추측과 오감이 시키는 대로 떠돈다.
길을 잃은 채, 마을도 만나고 나무도 개도 꽃도 사람도 만난다. 길을 잃어봤자 섬진강 옆이지 않은가. 언제든 강으로 가면 길을 찾을 수 있다.
― <9월 ‘길을 잃은 뒤에야’> 중에서
다큐멘터리 <타샤 튜더>를 보았다. 아흔 살을 넘긴 노작가가 정원을 가꾼다. 잡초를 뽑고 흙을 파낸 뒤 알뿌리 식물을 심는다. 꽃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꽃들이 좋아하는 자리까지 기억하고 배려한다. 정원이 이렇게 꼴을 갖추기까지 3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본 뒤, 생태책방에 갖출 책 백 권을 더 골랐다. 읽은 책들을 중심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둔 덕분에 네 시간 만에 마쳤다. 타샤 튜더가 정원을 채울 꽃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랄까.
책방을 찾는 이들은 무슨 책이 있는지 둘러볼 것이고, 어떻게 책들을 묶었는지 살필 것이며, 짧은 추천의 글을 읽으며 왜 이 책이 여기 놓였는지 생각할 것이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 앞에 멈출 것이다. 정원에 핀 다양한 꽃 중에서 하나를 유심히 살피는 산책가처럼.
― <11월 ‘책방의 꽃 정원의 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