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부터 나는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 성별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가르쳐준 적 없이 나 스스로 찾아낸 깨달음이었다. 바지, 자동차, 축구, 서서 쓰는 변기, 파란색……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남자아이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물건과 장소들.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모든 관념과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성별 이분법의 질서에서 나는 항상 겉돌았다.
― 1장 중에서
다행히 나는 죽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온라인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트위터에는 나와 같은 주파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서로를 무지개라고 부른다. 무지개는 다양성을 상징한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 범성애자, 트랜스젠더, 에이젠더, 논바이너리……. 그 밖에 나도 아직 잘 모르는 수많은 정체성들이 존재한다. 전파에도 빛깔이 있다면 우리의 신호는 프리즘처럼 무지개색으로 빛나지 않을까?
― 4장 중에서
나는 어른 무지개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너무나 궁금했다. 그들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나처럼 남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리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언젠간 어른이 되면 저 사람들처럼 스스로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 7장 중에서
‘당신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사실을 알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무지개가 아닌 지예는 이해할 수 있을까?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존재, 애매함과 망설임 그 자체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이렇게 넓고 복잡한 세상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창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능력은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걸까?
― 7장 중에서
잊고 싶은 일을 겪으면 나는 그 기억을 아주 작은 상자에 집어넣는 상상을 해. 그 상자를 조금 더 큰 상자에 넣고, 그 상자를 또 한 번 더 큰 상자 속에 집어넣는 거야. 속에서 끝없이 작은 인형이 튀어나오는 러시아 인형처럼. 그거 이름이 뭐였더라?”
“마트료시카?”
“그래. 마트료시카처럼. 나중에 기억이 떠오르려고 하면 자동차나 집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큰 상자를 먼저 떠올려. 그 큰 상자를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조금 덜 큰 상자를 또 열고…… 그렇게 상상 속에서 상자를 하나씩 풀어 나가면서 기억이 떠오르는 걸 최대한 늦추는 거야.”
― 14장 중에서
집들이 빽빽이 늘어선 풍경이 새하얗게 밝아지더니 광활한 남극 대륙으로 변했다. 나는 펭귄이 되었다. 무리에서 떨어져 반대로 걸어가는 외톨이 펭귄. 머릿속 나침반이 망가져버린 이상한 펭귄.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어. 이대로 계속 반대로 달려가는 수밖에.
― 15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