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소는 음침한 뜰을 내다보는 좁은 창문이 두 개밖에 없어 화창한 날에도 공기가 답답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거기에 눅눅한 느낌까지 보태졌다. 게다가 어떤 불안까지 감돌았다. 이곳 사람들이 하는 표현으로, 공기를 칼로 자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_ 10쪽
혼란과 망연자실, 또 조롱과 경멸의 분위기가 북에서 남까지 전국을 휩쓸었다. 나쁜 날씨 때문에 가끔 지연된 것 외에는 아무런 사건이나 동요 없이 선거를 치렀던 지방에서는 평균과 거의 다름없는 결과가 나왔다. 제대로 표를 찍은 사람 숫자도 평소와 비슷했고, 고질적인 기권자 숫자도 비슷했고, 무효표나 백지투표는 거의 없었다. 수도가 가장 순수한 공적 선거 정신의 모범으로서 전국에 중앙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바람에 평소 모욕감을 느끼던 지방의회들은 이제 따귀를 맞은 것을 돌려주며, 자신들이 나라의 수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뭐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던 그 신사와 숙녀들의 어리석은 허세를 마음껏 비웃어줄 수 있었다. _ 31쪽
며칠이 지나면서 백지라는 말이 갑자기 외설적이거나 무례한 말이라도 된 것처럼 입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지하기 힘든 정도였지만 곧 누구나 느낄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방법으로 그 말을 피해가거나 에둘러갔다. _ 67쪽
저 자들은 우리가 마치 격리해야 할 전염병 피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를 고립시켰잖아, 총을 든 군인들을 배치시켜놓고 도시를 나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쏠 텐데, 그런데 우리가 뭘 좋아한단 말이야. _ 132쪽
4년 전에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굴던 이 어리석고 쓸데없는 태도에 종지부를 찍읍시다, 우리가 눈이 멀었던 시기에 삶이, 그걸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 삶이 어땠는지 공개적으로 이야기합시다, 신문이 그것을 보도하게 합시다, 기자들이 그걸 쓰게 합시다, 텔레비전이 우리가 시력을 회복한 직후에 찍은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게 합시다, 우리가 견뎌야 했던 여러 가지 악에 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게 합시다, 죽은 자들, 사라진 자들, 폐허, 화재, 쓰레기, 부패를 이야기하게 합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상처를 묶으려 했던 가짜 정상 상태라는 헝겊 조각을 찢어버리고 나서, 그 시절의 눈먼 상태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_ 230~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