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을 게다. 만일 없다면 그는 불쌍한 사람이다. 무지개를 처음 보았을 때의 흥분과 경이로움을 기억한다면, 그의 가슴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리라. 얼마 전 콜롬비아의 정글에서 포로로 납치되었다 풀려난 미국인들에게도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게릴라들에게 납치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무지개를 보았다는데, 자유를 잃은 포로의 눈에 비친 무지개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30~31쪽 중에서
저는 그의 것이에요, 라고 맹세하며 / 당신의 몸이 떨리고 한숨이 나올 때 / 그리고 그 역시 당신을 향한 그의 / 무한한, 영원한 열정을 맹세한다면─ / 아가씨, 이걸 알아둬 / 당신들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 도로시 파커,「불행한 우연의 일치」 전문
하하하. 진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를 누가 막겠는가. 충고 따위는 필요없어. 불행해져도 좋으니…… 내 생애 한 번만이라도…….
‘불행한 우연의 일치’ 혹은 ‘아가씨, 이걸 알아둬’가 이 시의 주제이다. 남녀 사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열정은 없다고 문어체로 풀어서 시시콜콜히 설교했다면,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나이 지긋한 여인이 젊은 아가씨를 앞에 두고 넌지시 충고하는 대화체. 일부러 짜낸 게 아니라 내용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형식이라서 감칠맛을 더해준다. 신춘문예를 위해 억지로 만든 ‘작품’에는 이런 생동감이 없다.
─66~67쪽 중에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전문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위에 그는 아주 정교한 마음의 조각들을 새겨 모자이크를 완성시켰다. 병적으로 예민했던 시인에게 사랑은 고통이었지만, 언어의 문을 잠그기 전에 그가 완성한 ‘빈집’에 머물며 독자들은 위안을 얻으리라.
─ 124~125쪽 중에서
바람과 매가 부딪칠 때, / 하늘에 무슨 흔적이 새겨질까? / 그렇게 당신과 나는 우연히 만났지, / 그리고 몸을 돌려, 그리고 같이 잠들었지. // 달도 별도 없는 / 많은 밤들을 견디었으니 / 한 사람이 멀리 떠나더라도 / 우리는 참아야 하겠지. ─레오너드 코헨,「안개가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부분 인용
컴퓨터로 소통하고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시대에 사랑이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늘을 나는 매는 없지만, 우리 곁에 아직 안개와 바람과 푸른 언덕이 남아 있으니 희망을 가져야겠다. ─ 140~141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