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어리기만 한 공주이기에 두풍은 미실이라는 여인에 대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주는 왜 어머니가 심한 울증에 걸렸으며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지 거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얼굴까지 해쓱하여 찾아온 덕만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두풍은 그제야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금기시 되어온 그날의 일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두풍의 얘기를 들으며 덕만은 놀라기도 하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미실궁주를 둘러싸고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이 궁궐 안에 오래오래 계속되었답니다. 진지왕께서는 그것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그렇게 된, 참으로 불운한 분이셨지요. 그분은 미실이라는 여인을 뿌리째 완전히 뽑아내 불사르지 못하고 떠난 것이 원통하고 또 원통하여 저승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실 것입니다. 공주님, 왕후마마가 그렇게 되신 것도 다 미실이라는 여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왕후마마를 잘 보살펴 드리세요.”
─1권 <어린 왕과 미실> 중에서
덕만은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부터 봄날이 이토록 싫어졌는지. 덕만이 예닐곱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사월 초파일이었다. 부처님을 뵙고 오는 길에 마야는 두 딸에게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했다. 덕만은 그때만 해도 씩씩하게 이런 대답을 했다.
“어마마마. 저는 천명언니가 왕위를 잇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도 왕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머니도 기쁘실 테지요.”
어린 덕만은 그 말이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서일까. 덕만은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그간 장난 같은 덕만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던 마야였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직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게야? 닥치지 못하겠느냐!”
덕만의 말을 가로막는 마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권 <왕이 된다는 것> 중에서
“얘야, 그래도 꿀과자를 끊고 싶지는 않아. 이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그러느냐.”
“그럼, 은행으로 만든 한과를 드셔보세요. 향기도 좋고 단맛도 있답니다.”
“그래? 은행이라면 기침과 목을 다스리는 데 좋다고 들었다. 한번 그리 해볼까?”
마야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관심을 써주는 덕만이 고마웠다. 천명 역시도 혼자서 감당해 왔던 일을 동생과 함께 나누니 살맛이 나기 시작했다. 세 모녀는 온종일 함께하면서 마음을 나누었다. 어머니의 울화증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였다. 음식도 음식이었지만 무엇보다 덕만은 자신이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음이 어머니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임을 깨닫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섭생에 보다 정통한 자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는 백성들에게도 중요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덕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1권 <왕후의 우울증> 중에서
“나라가 위급합니다. 아바마마께서 돌아와 이 일을 해결하기에는 백성들의 피해가 너무나 큽니다. 지금은 궁주마마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제발 백성들을 도와주십시오.”
미실은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진흥왕이 살아 돌아온 듯한 충격이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감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나라의 기반을 다져온 진흥왕. 그는 자나 깨나 백성들만 생각했고 그들을 자식처럼 아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덕만공주가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천명에게는 없는 것을 덕만이 가지고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일이었다. 용수가 자신을 죽이려 골몰하던 그 와중에 홍수를 대비하여 모든 것을 정비했고 기꺼이 자신의 발품까지 팔아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덕만의 참모습이었다. 그리고 원수와 다름없는 자신을 몸소 찾아왔다. 미실은 다시 태어난 몸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권 <옥새를 빼앗기다> 중에서
“너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아비의 심정도 편치는 않구나.”
덕만도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만큼은 막아주리라 믿었거늘. 덕만은 순간, 온몸이 풀리면서 현기증이 났다.
“성골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몸을 나라에 맡겨야 하느니라. 나라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그 어떤 욕심도 버려야 한다. 너희 부부는 십 년이 넘게 잘 살아왔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어. 후사를 위해 아이를 많이 낳는 것도 우리 성골의 의무이자 책임이 아니더냐. 그리 되면 네가 왕위에 오르는 일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것이다. 내, 중신들과 약조를 했으니 덕만은 내 뜻을 따르도록 하여라.”
성골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가. 덕만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2권 <생이별> 중에서
덕만은 마침내 결정했다. 아무런 방패막이 없는 궁궐에 홀로 서려면 누구보다 보종이 필요했다. 미실이 비록 지금은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살고 있지만 삼대째 국정을 좌지우지하였기에 아직도 미실의 추종세력은 많았다. 특히 보종이 있는 한 더욱 그러했다.
‘이들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일은, 다름 아닌 유신과 춘추를 미실의 집안과 혼인시키는 일이다. 혼인을 맺는 일만큼 서로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렇다, 바로 그것이야.’
─2권 <하나의 뜻>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