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문학적 무능이 80년대를 해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80년대를 아름답게 살려내고 싶은 바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바람을 품을 때마다 내가 80년대에 20대를 보냈다는 것이 그때 어리숙했던 내게는 형벌이었지만 바로 이런 의미에서는 얼마나 뜨거운 축복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 것이다.” -「작가 후기」 중에서
-좋겠군요, 형은 도망갈 데가 있어서.
입대 전날 술집을 비틀거리며 빠져나오던 지섭을 부축하며 인경이 말했다.
-모두들 얼마나 황당해하고 화가 나 있는 줄 알아요?
비난하는 표정이 역력한 인경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쳐 막으며 지섭은 인경의 긴 머리칼을 자꾸 쓰다듬었고, 그제서야 인경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다릴게요.
한참 뒤 눈물에 젖은 볼을 제 손으로 훔쳐내며 인경이 말했다. 지섭을 올려다보는 인경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지섭은 인경의 턱을 한 손으로 가만히 들어 올렸다.
-무얼 기다리지? 우리에게도 아직 기다릴 게 남아 있던가?
그는 정말 도망치는 사람처럼 술집 뒷골목을 빠져나와 논산으로 떠났다. 다시 5월이었고 먼 산에서 피어나는 연초록빛 이파리 사이로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그는 쉽게 그것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푸른 옷, 연병장 시궁창 속을 구르면서 발견했던 연보랏빛 제비꽃.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리고 지섭이 도망쳐 나온 세상처럼 죽음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서울입니다」 중에서
-아버지…….
아버지는 민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희미한 경련이 일었다.
-……가자.
아버지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민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말해야 한다. 아버지 저는 이미 결심했어요. 그러나 말라붙어오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민수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주름진 눈은 분노하기보다는 애원하고 있었다. 민수는 순간 아버지에게 안겨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화해를 하고, 그리고 착한 딸이 되고, 그리고…….
-아빠, 전 가지 않겠어요…….
아버지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번쩍 튀었다. 그것은 벼락처럼 민수의 몸을 내리 덮치는 것 같았다. 민수는 그것이 제 몸으로 와서 부딪치는 아픔을 느꼈다. 잠시 후 아버지는 그대로 돌아서서 침착하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더 묻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12·12사태, 광주 ××공사 대표이사, 화려한 만큼 죄스러웠던 경력을 가진 아버지의 어깨는 아주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이 왜 그리 가여워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뒷모습」 중에서
“어때요, 학교 많이 변했지요?”
민수가 묻는다.
“응.”
“하루하루가 달라요. 짭새들도 더 늘고, 더 눈을 희번덕이고 있어요.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남학생들은 잔디밭에서 포커를 치고 짭새들은 그걸 구경하지요. 그리고 어떤 날에는 선배들과 새로 인사를 나누는 신입생들에게 짭새들이 다가오곤 하지요. 모여 있으면 안 된대요. 우리들은 그저 학원에 나온 학생들처럼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민수는 천천히 말을 한다. 지섭은 문득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느낀다. 복학이라는 것은 어쩌면 지섭에게 이런 변화와 마주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묵묵히 앞만 보고 있는 지섭을 바라보며 민수가 맑고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웃는다.
민수.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던가. 짧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지섭에게 뛰어와서는 형, 점심 먹었나요? 강의 많이 남았어요? 문과대 애들 탈춤 연습하는 거 보러 가지 않을래요? 조그만 입으로 숨을 꼴딱거리며 쉬다가 형, 저, 사실은 지금 수업 시간이에요. 들어가긴 들어가 봐야 돼요, 하면서 박하사탕 두 알을 내민 적도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