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오늘을 살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지만 때로 과거는 나의 오늘과 미래를 말해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과거와 화해하려고 오래도록 노력했다. 한때는 미워했었고 한때는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던 그 어두웠던 기억들. 그러나 때로 과거는 강렬한 고통의 빛 너머에 있던 부드러운 그림자의 기억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때 곧 죽을 것만 같은 나를 위로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커피잔을 건네던 친구들의 근심스러운 얼굴, 혼자서 오로지 혼자서 이를 악물고 버텨내던 시간 속에서 문득문득 내려 앉던 평화들…… 내가 하루 종일 틀어놓았던 피아노의 선율들, 가을의 냄새들……. 사람은 누구나 어리석다. 적어도 그런 면들을 갖는다. 나는 이제 나 자신과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두 팔로 감싸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작가 후기」 중에서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이 집에 들어섰다. 그의 손끝에는 정관의 멱살이 잡혀 있었다. 어디서 얻어 입었는지 정관은 교복 대신 물들인 검은색 군복 차림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와 눈이 휘둥그레진 여자들 앞에서 발길로 두어 번 정관을 걷어차고는 금속 장식이 달린 멋진 모자를 고쳐 썼다. 그러고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가 방금 전 술이 거나해진 채로 돌아왔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온 날이면 으레 그랬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여자들의 신경은 저녁 내내 고슴도치들처럼 곤두서 있었다. -나 같으면 엄마처럼은 안 살아. 사춘기에 들어선 언니 정희는 언젠가 수업료 고지서를 어머니에게 내밀며 그렇게 말했었다. 이불 홑청을 펴놓고 입안에 든 물을 푸우 하고 내뿜던 어머니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정희를 노려보았다. 그런 어머니의 눈빛에서 순간이었지만 파란 불꽃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내리깔고 어머니는 홑청을 차근차근 개어서 댓돌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그것을 밟았다. -수원의 아버지 집은 근사하던데. 날마다 고기 굽는 냄새구……. 어머니의 무표정을 바라보며 정희가 다시 말했다. 대체 누구에 대한 증오였을까. 정희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월계꽃 피던 밤」 중에서
정인이가 요 며칠째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미송이 했었다. 아버지가 수원에 간 후로 이제는 아예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라고……. 정인이가 싫어할까 봐 도시락을 같이 먹자는 이야기도 못하겠다고, 미송은 우울한 얼굴이었다. 명수의 등이 축축이 젖어오는 것 같았다. 그의 등에 묻은 정인의 어깨가 옹송그려지고 있었다. 정인이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명수의 가슴이 묵직해지고 얼얼해진다. “어디로든 갔으면 좋겠어……. 서울이든 부산이든…… 인천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정인이 수원이라는 지명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명수는 얼른 감지한다. “이담에 크면 내가 데려가줄게……. 서울이든 부산이든 미국이든…… 내가 데려가줄게, 정인아…….” 둑길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명수는 말했다. 그것 외에 달리 더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이제 어둠이 내리기 위해 서늘해져버린 마을의 풍경을 향해 둘이 탄 자전거가 달려 내려오고 비탈길 저 아래로는 서서히 역을 빠져나가는 기차가 보였다. -「은륜의 바퀴 위에서」 중에서
죽음 같은 나날들……. 단 한 번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를 빈 적이 없었지만 정인 자신에게 생각이 향하면 그건 그랬다.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에 갈 기회를 단 한 번만이라도 준다면, 신이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아니,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았던 오빠 정관이라 할지라도 그 누가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권한다면 정인은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학력고사를 보는 데 필요한 인지대 오천육백 원이 없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정인이 어느 날 새벽 수원 아버지 집 앞에 갔던 이야기를 미송은 모를 것이다. 차마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새로 샀다는 아버지의 포니 자동차가 서 있는 집 앞에 서 있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정인이 한 결심을 미송은 모를 것이다. 그날 기차가 달려갈 때 차창으로 부딪히던 늦가을의 바람 소리가 정인의 마음을 얼마나 할퀴고 갔는지 정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송은 죽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인은 죽음 같은 나날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 미송은 실제로 총칼 밑에 죽어간 이천 명의 투사들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두 처녀는 그래서 머뭇머뭇 이제는 재미가 없어진 어린 시절 이야기로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우체국에 앉아 있는 여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