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멀어지는 목소리를 부여잡기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그가 다시 말했다.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저쪽의 목소리이니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신기루처럼 꺼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나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착각은 아닐까, 혹시 그의 고객 중에 노은림이라는 이름이 또 있던가……. 그는 그런 불길한 생각들을 두서없이 했다. 잠시 웃음을 멈추고 여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냥 웃음이 나왔어. 생각해보니까 우스운 것 같아서……. 여기 지하 다방이야. 꼭 내가 스물여섯 살 적에 형한테 몰래 전화 걸던 생각이 나는 거 있지?”
“…….”
은림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는 걸 그는 그제야 깨달으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귓불이 확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랬다. 은림이었다. 저렇게 말하는 여자, 노래하듯 경쾌한 서울 토박이 말씨로 이야기하는 여자, 7년 만에 전화를 걸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냥 웃을 수도 있는 여자.
―「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명우 씬 왜 그렇게 음악이라든가 미술이라든가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
어두운 계단을 오르면서 여경이 물었다. 혹시나 그런 질문에 명우가 자존심이라도 상할까 봐 그의 한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였다.
“글쎄……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어.”
“그럼 뭐에 관심이 있지? 케니 지도 모르고 짐 모리슨도 모르고, 샤갈 전시회 한번 그렇게 가자고 해도 가지 않고, 요요마도, 미도리도 모두 관심조차 없잖아요?”
“대신 난 이미자는 알아. 조용필, 그리고 이중섭.”
그는 자신에게 매달린 듯 걷고 있는 여경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바짝 끼워 넣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녀의 작고 동그란 가슴이 느껴졌다. 여경은 갑갑한 듯 잠시 몸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했다.
“나도 뭐 꼭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아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주는 사람들이잖아. 게다가 볼링도 못한다, 테니스도 쳐본 일이 없다. 수영은 어렸을 때 동네 바닷가에서 한 게 전부다. 정말 재미없어. 대체 그럼 학교 다닐 때 뭐 했어요?”
“글쎄…… 뭘 했었지?”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학교 다닐 때 무엇을 했던가.
―「4 노은림이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