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소년은 수만 가지의 기억과 감정의 파편들, 엉망으로 이어 붙인 패치워크 같은 장면이 함부로 뒤섞인 파도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그 파도 속에서 고작 십수 년을 살아서는 느낄 수 없을 절실함과 죄책감, 질긴 염원으로 소녀를 보았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소녀의 입술이 경련하였다. 붉은 피가 뭉클뭉클 입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붉던 입술은 파랗게 식어갔다.
“바라.”
소년은 백 년의 염원으로 소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맞닿은 두 입술 사이로 소녀의 더운 피와 소년의 뜨거운 눈물이 뒤섞였다.
이내 심장이 멈췄다.
―「프롤로그_ 화엄의 고리」 중에서
“넌 장현도이면서 장현도가 아니야. 누구지?”
나를 의식하는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내가 누구인지 확신이 없다. 기묘한 뒤틀림으로 반복된 시공간 속에서 각각의 우주에 흩어졌을 내가 이 우주의 현 시각에 중첩되어 있는 상태라면, 과연 거대한 의식이 인식하는 나는 누구인가. 현재라는 시간의 의미는 또 무어란 말인가.
믿어달라.
바로 윗줄까지 쓰고서, 나는 긴 시간을 망설였다. 아무리 기를 쓰며 정확히 기록해 보고자 하나, 세상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듯이 나의 본질 역시 불확정적이기 때문이다.
기록을 포기해 버리고 아이처럼 벌렁 드러눕던 순간, 나는 의식 바닥에 깔려 있는 어린애 같은 나를 끄집어 올렸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만 깨우칠 수 있었던 시절의 아이처럼, 의식과 논리가 수만 갈래로 파생되기 전의 순진무구한 어린애처럼 접근하고자 한다. (중략)
쉽게 설명하자. 이제부터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체인 나는,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나이면서, 오랜 시간을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역사이다. 이 우주의 현 시각에서 당신이 더듬어온 나와는 다른 장현도처럼 느껴질 것이다. 당신이 멱살을 잡고 싶어 할 만큼 분노했듯이, 그러하다.
나는 그가 아니다.
―「1장 슈뢰딩거의 고양이」 중에서
바라가 교실 저편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한 발짝씩 천천히 나를 향해 움직였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는 강력한 중력장이 시공간을 휘게 만들어. 그러니까 나는 똑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림 없이 내 길을 가고 싶었는데…….”
바라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아슬아슬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트램펄린처럼 휘어버린 시공간 때문에 할 수 없이 너를 뱅뱅 돌게 되는 거야.”
(중략)
바라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내내, 장현도, 너 때문에 어지러웠으니까.”
바라의 말에 무지개 같은 현기증이 일었다. 내가 바라의 손을 잡아 회전을 멈추었을 때 바라는 힘의 반동으로 넘어지듯 내 가슴에 부딪혀왔다. 바라가 어깻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이었다.
“넌 매직 스피어(magic sphere) 같아. 난 그러니까,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을 넘어버렸어. 나는, 언젠가 너한테 빨려 들어가 소멸하겠지.”
바라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바라의 홍채는 붉고 동시에 검었다. 상상 속 불로초의 꽃술처럼 신비로운 무늬와 빛깔 때문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네가 나의 무덤이 된다면, 나는 그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텐데.”
―「2장 사건 지평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