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은 고개를 돌려 좌의정을 바라보았다. 좌의정과 한 베개를 베고, 한 이불을 덮은 자신을 상상했다.
다음 순간, 영의정은 대전 바닥에 제 머리를 쿵 찧었다.
“죽여주시옵소서.”
죄를 비는 영의정의 모습에 왕은 그제야 조금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덕이 많은 여인이 세자빈이 되는 것도 좋을 것이오. 허나 이번엔 그보다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것이 있소.”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을 깬 왕께서 진실로 하고 싶었던 한마디를 입에 올렸다.
“우리, 얼굴도 좀 봅시다.”
―<너는 나의 것(我取?)> 중에서
“앞으로 제 종자(從者) 노릇을 할 아이입니다.”
향의 입에서 느닷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순간, 노인을 향해 달려들던 해루는 그 모습 그대로 굳어진 채 그를 돌아보았다.
“종자라고요?”
말하자면 종노릇을 할 아이란 뜻?
어이가 없어진 해루는 항의 섞인 눈빛으로 향을 노려보았다.
“제가요?”
언제요?
문득 향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반듯한 미소 속에 짓궂은 느낌이 가득 묻어났다.
해루의 눈앞으로 바싹 다가온 향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활짝 펼쳤다.
해루의 손바닥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
그 종이 위에 반듯한 모양으로 딱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망했다> 중에서
눈앞에 펼쳐진 믿기 어려운 광경에 해루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조금 전까지 험상궂은 표정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산적들. 모두 여섯이나 되는 산적들이 어찌 된 이유에선지 바닥에 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보다…….
해루는 다급한 눈길로 향을 찾았다.
이내 익숙한 푸른 도포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향은 고목 아래에 쓰러진 산적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있었다.
미동도 않고 있는 저 모습은…….
“설마…… 죽은 겁니까?”
멍하니 서 있던 해루는 밑동 잘린 허깨비처럼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죽었어? 정말?”
―<대체 정체가 뭐냐?> 중에서
해루는 허리를 빳빳이 곧추세웠다. 발끝을 파고드는 예리한 감각이 그녀를 긴장시켰다.
그 미묘한 동요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내내 차갑던 사내의 얼굴이 마치 봄눈 녹듯 풀어졌다. 사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탕관에서 흘러나온 차향이 등파와 고랑을 넘어 순숙(純熟)으로 흩어졌다. 순간, 거짓말처럼 주위의 공기가 돌변했다. 위험한 향내를 풍기던 사내는 금세 무방비 상태가 되어 느른해진다. 바라보는 상대조차도 경계심을 풀 정도로.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던 해루가 다시 물었다.
“정말 음 선생이 맞습니까?”
“그리 묻는 연유가 무엇이냐?”
“전설적인 인물이라 들었습니다. 소녀를 여인으로, 이름 없는 잡풀을 향 품은 꽃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여인인 줄 알았다?”
사내의 자세가 느른해졌다.
“아직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찾아온 용건은?”
“그게…….”
해루는 말끝을 흐렸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사내가 눈빛으로 재촉했다.
“여인이 되고 싶습니다.”
―<월인천강 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