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사는 게 어떠니? 이제 좀 적응이 돼?”
빵을 꾸역거리며 씹던 그가 순간 씹던 동작을 멈추었다. 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사무실에 앉은 네 사람 사이로 긴장감 같은 침묵이 어렸다. 그가 먹던 빵을 마저 천천히 씹었다.
“보내주신 답장 잘 받았습니다…… 오늘 여기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와서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주임님이 수녀님께서 삼십 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전철 타고 버스 타고 오신다고…… 그 말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나왔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얼핏 아주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니까 그 평온은 가면처럼 딱딱해 보이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
“……오지 말아주십시오. 편지도 받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둬 주십시오.”
―57~58쪽 중에서
“유정아…… 고모는…… 위선자들 싫어하지 않아.”
뜻밖의 말이었다.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가엾어……”
―185~186쪽 중에서
“나는 이왕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거, 당신하고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일 년에 봄이라는 계절이 한 번뿐이라는 거 당신 때문에 처음 알았어요. 이 봄을 다시 보기 위해 일 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처음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자 당신이 말한 대로 이 봄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 봄처럼 내게도 느껴졌다는 거예요. 한 계절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그렇게 늘 오는 계절이, 혹여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계절이 될 수 있다는 거. 그래서 하루하루 목이 타는 것처럼 애타게 지나간다는 거…… 나무에 물이 오르는 그 찰나도, 진노랑꽃 무더기로 피어서 흔해빠진 그 개나리에게도, 당신은 그 모든 것이 처음 대면하는 기분이고 또 대며하자마자 안녕, 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 그래서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물들이 널려 있는 게 아니라, 가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혀올지도 모른다는 거…… 그거 당신 때문에 알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당신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는데, 그게 나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 알게 되었거든요.”
―229~230쪽 중에서
인간이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았고,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고, 존댓말을 쓰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인자로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제 육체적 생명은 더 연장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 영혼은 언제까지나 구더기 들끓는 시궁창을 헤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차마 구더기인 줄도 모르고 그곳이 차마 시궁창이었는지 모르고…… 저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을 가져보았습니다. 기다리는 것, 만남을 설레며 준비하는 것, 인간과 인간이 진짜 대화를 나눈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서로 가식 없이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사랑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용서받아본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330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