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친구가 그제서야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어제는 분명히 보름인데 새벽까지 기다려도 달이 뜨지 않았어. 정말이야.”
“달이라니?”
“하늘에 뜨는 달 말이야.”
“하늘에 뜨는 달?”
“챠쉭이 간밤에 야참으로 건빵을 씹었나. 군바리 쫄다구처럼 내 말에 복창만 연발하고 있네. 그러지 말고 니 영특한 닭대가리로 숙고를 해서 지난밤에 왜 달이 뜨지 않았는지 나름대로의 견해를 한번 피력해 보란 말야.”
“이 쉐이야. 니가 말하는 달이 뭔지 알아야 의견을 피력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하늘에 뜨는 게 한두 가지냐. 니 말만 듣고는 곤충 종류인지 새 종류인지 비행기 종류인지 풍선 종류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잖아.”
“너 지금 나를 데리고 퀴즈 프로에 출연할 연습하고 있는 거냐.”
― <2장 한 마리 시조새가 되어 달빛 속을 선회하던 여자가 있었다> 중에서
“너는 전혀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아이로구나.”
“어른을 공경할 줄은 몰라도 어른을 공격할 줄은 알아염.”
“이 아저씨는 너를 만나고 비로소 대한민국의 장래가 암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6이나 쳐드셈.”
“반사.”
나는 녀석의 말투에 그만 정나미가 떨어져서 인사도 나누지 않고 재빨리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186이나 쳐드시라니. 녀석이 마지막으로 내게 던진 은어는 지독한 욕지거리였다. 186을 한자로 변환하면 一八六이 되고 그것을 종렬로 합체하면 한글로 좃이 된다. 그러니까 ‘186이나 쳐드셈’을 의역하면 ‘좆이나 먹어라’가 된다. 그러면 내가 받아친 반사란 무엇이냐. 그 욕지거리를 상대편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는 뜻으로 쓰이는 반격어다. 니 놈이나 처먹어라. 나무관세음보살.
― <7장 내가 보기에는 세상 전체가 미쳐가고 있다> 중에서
“매달 보름날에는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있나요?”
“저는 달빛 중독자거든요. 매달 보름날 달빛으로 목욕재계를 하지 않으면 매사에 의욕을 잃어버리는 금단현상을 앓아요. 그래서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구봉산에 올라가 활공을 해요.”
“활공을 하다니요.”
“보름달이 떠오르면 행글라이딩으로 달빛 속을 유영하는 거지요. 구봉산에 활공장이 있어요. 오늘이 보름이잖아요.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도 달빛으로 목욕재계를 했어요. 이 달맞이꽃도 활공장 주변에서 꺾은 거예요. 직장을 얻은 기념으로 여기다 꽂아둘게요. 하지만 낮이 되면 꽃잎들이 오그라들어서 보기가 별로 좋지 않을 거예요. 아시다시피 달맞이꽃은 밤에만 피거든요.”
그녀는 빈 소주병 하나를 찾아서는 물을 채우고 달맞이꽃을 꽂았다.
― <8장 강도가 칼 대신 꽃을 들고 닭갈비집에 침입하다> 중에서
노인은 젓가락으로 물을 찍어 탁자에 백자심경선주병(白磁心境仙酒甁)이라는 한자를 써 보였다. 그리고 음미하듯 천천히 술을 들이켠 다음 잔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노인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나는 석 잔을 받을 때까지도 특별한 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의 맹물에 가까운 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넉 잔을 받았을 때 비로소 노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갑자기 혈관이 투명해지면서 미묘한 향기가 맡아졌는데 놀랍게도 그 미묘한 향기는 여린 연두색이었다. 처음에는 혀가 연두색으로 물들었고 다음에는 목구멍이 연두색으로 물들었으며 급기야는 온몸이 연두색으로 물들었다. 신기했다. 시각과 후각이 공감각적 현상(共感覺的現像)을 일으키고 있었다. 향기에도 색깔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찬수녀석이 카운터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서, 둘이서 잘들 놀아보쇼, 하는 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17장 마음 안에서 사라진 것들은 마음 밖에서도 사라진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