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에는 그 사람이 습기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가녀린 몸을 겨우 가누고 있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기자가 묻는다. 그녀가 쉽게 밝히지 않을 것 같은지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굳이 그 사람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본인은 알고 있을 테니까 곧 만나게 될 거 같구요. 여러분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한때는 그 사람을 완전히 잊었다고,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그런 게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창백한 피부에 피곤한 표정이지만 형형한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촉촉이 빛났다. 그녀는 메마른 입술로 말을 이었다.
“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프롤로그_ 여배우의 기자회견> 중에서
“나는 내일 내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한다. 강시울이 떠난 뒤에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었어. 고통스러운 내게 다가와 아픈 몸으로 위로해 주는 여자를 보면서 저 여자를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결혼은 너무 외롭고 슬퍼서, 살아 있고 싶어서 했는데……. 하지만 그 여자는 너무 일찍 가버렸지. 나는 애초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할 걸 알면서 결혼했어. 나는 영혼이 멍들고 그녀는 육신이 상했으니 그럴듯하게 어울렸거든. 그런데 이번엔 날 버리고 가서 잘 살던 여자마저 죽는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왜 다들 병들어 죽어야 하는 거지? 왜 오래 살 수 없는 거야?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하늘을 분노하게 한 걸까.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나한테만 벌을 내리던가. 다정아, 이건 내 앞에 펼쳐진,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는 것뿐이야. 더 이상의 아무런 의미는 없어."
다정은 시진의 등 뒤로 다가가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시진도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게 보이는 듯했다. 분명 그도 이 상황이 행복한 건 아니다. 시진이 시울을 외면한다면 그것도 시진답지 않은 처사다.
― <제1부 영혼과 육신의 유표> 중에서
아프리카 스와힐리족은 사람이 죽어도 누군가 기억하고 있는 한 사사(sasa)의 시간에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으면 죽은 이는 그때서야 비로소 진짜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자마니(zamani)의 시간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녀는 죽어도 시진의 ‘사사’로 존재할 것만 같았다. 시울이 시진의 ‘사사’로 남는다면, 자신은 시진의 껍데기와 살아가는 먼지 같은 하찮은 존재가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치밀어 오르자 순간 애처롭게 여겨졌던 강시울의 모습이 악마로 보였다.
다정은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핏물보다 더 진한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이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서러운 마음으로 눈물자국을 지우고 나와 승용차에 올라탔다.
― <제2부 사랑, 그 이상의 사랑> 중에서
시울에게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독립유공자 집안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투사라 해도 격이 달랐다. 조진구네는 큰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집안이었고 강시울의 할아버지는 만주벌판에서 총칼을 들고 왜경들과 혈투를 벌이다 잡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였다.
조진구 집안에서는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면 훈장과 초상화를 걸어놓고 식구들이 모여 절을 했다. 그때마다 독립운동가인 조부의 은덕을 늘어놓곤 했다. 그 훈장은 여러 개가 복제되어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형제들은 집집마다 방문객들에게는 그 훈장에 얽힌 무용담을 들려주었고 주인공의 일대기를 상세히 기록한 책을 선물로 주었다. 집안의 아이들은 위대한 독립투사의 업적을 나열하며 자랑스러워했고 집안의 며느리나 사위들은 조진구의 할아버지, 조인석의 위업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를 새겨들어야만 했다. 어쨌거나 여배우 강시울이 그나마 집안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독립투사의 후손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 <제3부 은밀한 비밀> 중에서
조진구와의 관계는 노예계약과 같은 것이었다. 시진과 함께하는 지금은 아팠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듯 새로운 느낌이었다.
“시울이 네가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의미가 있어. 네가 아프지 않았다면 우린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지만 네가 아픈 덕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 우리 아무것도 원망하지 말자.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인생 끝날 때까지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았던 수수께끼가 풀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알아? 우리 이렇게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시진이 시울의 등을 도닥거리며 말했다. 시울은 눈에 고인 눈물을 애써 감추려고 고개를 숙였다.
“시울이는 내 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났잖아.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려주러 온 거야. 내가 도저히 못 풀었던 마지막 문제를 네가 와서 단박에 풀어준 거지. 지금부터 우리는 지나간 일을 결코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말자. 우리는 동시에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었으니까.”
― <제4부 오직 한 번 사랑한 사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