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 줄거리
고려 고종 19년(1232년), 초조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부인사에 몽골군이 쳐들어오고 스님들은 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며 싸우지만 10만 몽골군의 불화살로 인해 부인사는 순식간에 불더미로 변한다.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은 도장별감 최우를 위시한 무인세력에 의해 대장경의 소실 소식조차 듣지 못한 채 한 달을 보낸다. 밤낮으로 고심하는 고종에게 소식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던 최우는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목적으로 대장경의 소실 소식을 거짓으로 고하고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대장경 판각작업을 윤허해 줄 것을 상소한다.
불사로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법을 무기화해서는 안 된다고 고종을 설득하던 수기대사는 권력의 힘에 의해서 대장경 판각 불사가 거행되지만 힘없는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수기대사의 지휘 하에 차근차근 3년여의 준비작업이 시행되고, 드디어 고종 24년 2월, 강화도에 판목선이 돛을 내린다. 강화도 뱃전으로 나온 백성들은 산에서 누워 1년, 바닷물에 3년, 응달에서 1년, 소금물에 다시 1년을 담가 완성된 판목이 나라와 함께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기원한다.
전국 각지에서 대장경 판각 불사를 지원한 사람 중에는 승려 외에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열다섯 장균은 몽골군에게 부모와 누이들을 잃고 홀홀 단신이 된 후 수기대사를 찾아와 힘 있는 필체로 필생으로 발탁되고, 누대에 걸친 천민의 후예 근필은 판전을 지을 대목수로 일하여 극락왕생을 꿈꾼다. 이들을 포함한 오백여 명의 필생과 각수들은 3년을 하루같이 부처님의 경전을 옮겨 적고 새기는 연습으로 보낸다.
어느 날, 중신들의 자제들이 판각불사 작업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호부상서의 딸 가화는 장균의 늠름하고도 고귀한 기상에 끌려 연모의 정을 기르기 시작하고, 장균은 가화에게 연서를 받고도 불사를 그르칠까 염려하며 흔들림 없도록 노력한다. 호부상서의 방문을 받고 그때서야 장균과 가화의 일을 알게 된 수기대사는 필사 작업이 마치는 이틀 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한편, 대목수 근필은 미친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기울여 판전 공사를 진행한다. 판각 불사를 시작한 지 6년째, 드디어 불사는 마무리단계에 이르고 장균과 가화의 결혼식이 끝난 후 필생들과 헤어지는 자리에는 근필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온 마음을 다하여 판전 공사를 해온 근필은 경판이 봉안되는 것을 지켜보다 수기대사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본문 중에서
“다들 판전 안으로 드시오.”
지운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백여 명의 승군이 판전 앞에 줄을 섰다. 그들은 찢어지고 피가 얼룩진 옷이나 더럽혀진 얼굴과는 달리 눈동자만은 빛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가장 욕된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을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은 아닙니다. 비굴하게 이 순간까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린 죄인이 되려고 비굴한 마음을 갖지 맙시다. 그 대가는 짐승 같은 더러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서 이대로 성불의 길로 들도록 합시다.”
천장을 핥기 시작한 불길로부터 화기(火氣)가 끼쳐오는 장내에는 침묵만이 무겁게 쌓였다.
“여러분, 어서 먼저 가신 분들의 시신을 이리로 옮깁시다. 끝까지 지키다가 함께 가도록 하십시다.”
말없이 일어선 백여 명 승려들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둘씩 짝이 되어 시신들을 판전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시신과 중상자들을 다 옮겼을 때는 판전 안은 매운 연기가 맴돌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신 옆에 무릎을 꿇고 둘러앉았다. 누군가가 경판본(經板本) 한 장을 빼내어 끌어안았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다음 사람, 그 다음 사람이 차례로 경판본을 한 장씩 빼서 끌어안았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불타는 성전」중에서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 그 방법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오라 부인사에 봉안되었던 소실된 대장경에 걸맞거나 더 능가하는 규모로 대장경을 다시 판각하는 일이옵니다.”
상감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는 듯하더니 등을 용상에 기대버렸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게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인고?”
“신들이 미천하여 적의 손에 부인사가 소실되게 한 죄는 백 번 죽어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임을 뼈에 사무치게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불법은 본래부터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는 게 아니오며 다만 불법이 담겨 있던 그릇이 깨졌을 따름이옵니다. 그릇이 깨지면 필연코 다시 장만을 해야 하듯 대장경 판각도 서둘러야 할 줄로 아옵니다. 특히 적들이 대장경을 공략한 원인을 규명하면 그 필연성은 더욱 절실해지옵니다. 적들이 대장경을 공략한 이유는 선대 왕 현종조(顯宗祖)에 침입했던 거란병이 그때 새긴 대장경의 법력에 밀려 물러갔음을 상기하고 바로 그 판본을 불살라 버린 것이옵니다. 그러하온즉 다시 대장경 판각 불사를 위로 어지신 상감마마와 아래로 착한 백성들의 뜻을 한데 모아 이루게 되면 그때의 거란병도 물러갔거늘 어찌 오늘의 몽골병이라고 물러가지 않겠사옵니까.”
―「강화의 밤」중에서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그 처녀는 걷기를 멈춘 채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기대사는 그 처녀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었는지를 알아내려고 뒤꿈치를 세웠다. 처녀가 취하고 있는 자세로 그 방향을 어림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눈길을 움직이던 수기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방향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장균이었다.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각각 세 줄씩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소로(小路)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 처녀의 눈길이 머물고 있을 것으로 어림되는 방향에는 장균을 중심으로 좌우 한 사람씩, 그 뒤로 두 사람씩을 잡아 적어도 아홉은 그 범위에 들 것이었다. 그런데도 수기대사의 직감은 대뜸 장균에게 꽂히고 말았다. 결코 장균이 맨 앞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장균은 글씨 쓰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턱을 약간 끌어당긴 모습이어서 얼굴은 감추어진 데라곤 없었다. 다만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덮여 언뜻 조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수려하고 근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 「정지된 세월」 중에서
“저어……, 괴로우시더라도 며칠에 한차례씩 납시어 모두에게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의당 대사님을 찾아뵙고 설법을 받들어야 도리이오나 시간을 아끼고자 함이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수기대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수기대사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망할 것들 같으니라구, 고분고분 말을 들어먹지 못하고 무슨 짓들을 했단 말인가. 오죽 답답하면 예까지 찾아왔을까. 혼자 그 큰일을 감당해 가느라 얼마나 신경이 탈 거라고. 그러나 수기대사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제 나름대로 해결책을 강구해 가지고 와서도 굳이 전말은 묻어버리려는 근필의 후덕함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략)
일꾼들은 날이 갈수록 근필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크고 작은 기둥이며 길고 짧은 그 수없이 많은 나무토막들이 바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아무리 작은 나무쪽이라도 손대지 말라고 당부했던 말을 상기하게 되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자기들을 무시하는 줄 알고 어지간히들 속이 뒤틀렸던 것이다.
그런데 근필이 시키는 대로 나무를 옮겨다가 세우고 걸치고 하면 딱딱 들어맞는 것이 신기했고, 자꾸 날이 지나다 보니 차츰 집 모양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 「분수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