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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복음

예수복음

예수의, 예수에 의한, 예수를 위한 복음서

저자
주제 사라마구 지음 / 정영목 옮김
출간일
2010년 01월 20일
면수
552
크기
126*187
ISBN
9788973372317
가격
15000 원
구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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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노벨문학상과 『눈먼 자들의 도시』의 세계적인 거장 주제 사라마구 대표작

“사라마구의 예수는 1900년대에 발표된 어떤 문학 작품에서 표현된 예수보다 인간적으로 또 미학적으로 더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이 작품은 교회의 4복음서를 포함해 예수의 삶에 대해 상상한 그 어떤 작품보다 뛰어나다.”
― 헤럴드 블룸(미국 문학비평가, 뉴욕대)

모든 종교와 사회제도 속에 숨겨진 권위의 허상과 폭력성을
예수의 욕망과 갈등으로 폭로한 이 시대의 수작
“예수의, 예수에 의한, 예수를 위한 복음서”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숨쉬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자신의 운명을 회의하는 인간이라면,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의 복음서를 집필한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예수의 삶에 대한 기발한 상상이 돋보이는 ????예수복음????은 포르투갈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1991년 포르투갈에서 처음 발표된 이후 작가는 고국을 떠나야 했고, 유럽문학상으로부터 심사를 거부당했을 뿐 아니라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에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신성모독’, ‘편협한 이념의 소유자’ 등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의 아들 예수의 일대기를 성서에 기록된 사실과 사라마구의 풍부한 상상력, 유머와 위트 있는 문장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낸다. “사라마구 작품 중 가장 까칠하고 위험하다”(《뉴욕타임스》), “독창적이고, 뜨겁고, 아름다운 책”(《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은,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인 1998년 『예수의 제2복음』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에는 『눈먼 자들의 도시』『눈뜬 자들의 도시』『죽음의 중지』 등을 번역해 사라마구의 진가를 국내에 알려온 정영목 작가의 번역으로 새로이 출간된다.
이 작품에는 ‘인간으로 변장한 신’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궁금해 하며, 여인에 대해 남자로서의 욕망과 사랑을 품은 예수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 따위는 관심에도 없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인 하나님이 등장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정한 자신의 운명을 놓고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정한 길을 가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거대한 힘 앞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그런 인간을 이용하고 억압하는 종교나 제도로 대표되는 세상의 모든 권위의 허상과 폭력성을 폭로한다. 교회는 사라마구의 이와 같은 성서에 대한 접근을 두고 상징으로 이루어진 성서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는 비난을 일삼지만, 사라마구는 “글이, 문자가,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하며, “문자 그대로 성서에 나온 사실에 대해 상징적 읽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이런 상징적 읽기는 그것을 강요하는 집단의 의도가 숨어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을 억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복음』은 신을 부정하기보다는 신에게 힘을 부여하고 부정한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종교와 그 중심에 자리한 권위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세계의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두고 “사라마구 작품 중 최대 걸작이다”, “당신은 이 책과 더불어 예수를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등의 호평을 아끼지 않는 것처럼, 이 작품은 고정불변 또는 불가침으로 규정된 역사와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부조리와 모순을 들추며 우리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할 것이다.

저자 및 역자

본문 중에서

작품 줄거리

마리아는 어느 날 거지로부터 자신의 임신 사실을 전해 듣는다. 남편 요셉은 불쾌하지만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자신과의 짧은 동침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이때 로마의 헤롯 왕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출생지에 가서 인구등록을 마쳐야 한다는 명을 내리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그리하여 요셉과 점점 배가 불러오는 마리아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떠난다. 마리아는 우여곡절 끝에 베들레헴의 허름한 동굴에서 예수를 낳고, 그 기간 동안 요셉은 생계를 위해 목수 일을 한다.
이때 헤롯은 베들레헴에서 다음 왕이 태어났다는 선지자 미가의 예언을 듣고는 비밀리에 명을 내린다. 요셉은 일터에서 우연히 헤롯이 2세 미만의 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고 이야기를 듣자마자 동굴로 내달려 다행히 아들의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요셉은 그날 이후 학살의 이야기를 듣고도 다른 아이를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 받는다.
예수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요셉은 쟁터에 가게 되고, 여기서 반란군으로 몰려 십자형을 받고 처참하게 죽는다. 한편 예수는 요셉이 죽고 나서부터 아버지가 칼을 들고 쫓아오거나 학살당한 아이들이 나타나는 악몽에 시달리고, 이로 인해 어머니인 마리아와 갈등을 겪는다. 결국 예수는 집을 떠나 종교지도자들을 만나 논쟁을 벌이거나 양치기가 되어 하나님이 요구하는 희생 제의의 잔혹함과 부당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고뇌의 여정을 계속한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지나는 중에 어부들에게 물고기가 몰려 있는 곳을 알려주는 이적을 행하고, 한편 창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동거를 시작한다.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과 악마와 셋이 만나 자신의 운명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데……


본문 중에서

사흘 뒤 목수 요셉은 고객들에게 돌아와서 일을 마무리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회당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집과 그 안에 담긴 재산을 이웃 아나니아에게 맡기고, 아내와 함께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로마가 하라는 대로 등록을 하려는 것이었다. 소통에 약간 지체가 있거나 동시통역에 문제가 생겨 소식이 아직 천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풍경이 완전히 바뀐 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사방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유월절이 지나고 나서 첫 며칠 동안 사람들은 말하자면 원심력에 따라 이동했다. 예루살렘이라고 알려진 지상의 태양, 빛나는 중심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라면 비록 높은 곳에 있다 해도 하나님도 습관의 힘, 아무리 오류가 생기기 쉬워도 그것도 하나의 힘이기 때문에, 또 절대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통찰력, 이 두 가지의 도움을 받아 이들이 자신의 도시나 마을로 천천히 돌아가는 순례자들임을 틀림없이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세속적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이 낯익은 경로를 무작위로 가로지르는 바람에 생겨난 이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은 어떨까. 물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나님이 거룩한 지혜로 요셉과 마리아가 이 시기에 베들레헴에 가야 한다고 정해 놓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본문 56~57쪽 중에서

요셉은 제정신이 아니다. 모든 것에 부딪히고, 과일 상자와 새장을 뒤집고, 심지어 환전상의 탁자까지 뒤집지만, 성전 행상들의 성난 외침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오로지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생각뿐이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싶어 하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요셉은 필사적이다. 그는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자 했는데 이제 누군가 그 아이를 그에게서 빼앗아 가고 싶어한다. 하나의 욕망과 다른 욕망이 충돌하고 있다. 하고자 하는 욕망과 무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 묶고자 하는 욕망과 풀고자 하는 욕망,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 갑자기 요셉은 멈춘다. 그가 계속 이렇게 무모하게 내달았을 때 어떤 위험이 뒤따를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전 경비병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할지도 모른다. 이런 소동을 벌였는데도 그들이 아직 출동하지 않은 것이 놀랍다. 요셉은 최대한 표정을 감춘다. 옷 솔기에 숨는 이처럼 군중 속으로 사라져 바로 익명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남들보다 조금 빨리 걷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미로 속에서 그것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요셉은 도시의 성문에 이르기 전에는 뛰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군인들이 이미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창, 검, 그리고 자극을 하지도 않았는데 생겨난 증오로 무장을 하고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다. 만일 군인들이 말을 타고 간다면 절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가 도착할 때면 아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가엾은 아이, 어여쁜 예수. 이 깊디깊은 고뇌의 순간에 어리석은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임금, 이제 잃어버리게 생긴 일주일치 임금이 떠오른 것이다. 이런 치사한 물질적인 것들의 힘은 엄청나 요셉은 발을 멈추지는 않지만 속도는 늦춘다. 돈과 아이의 생명을 둘 다 구할 수는 없는지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찮은 생각은 떠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금세 사라져버린다. 자주, 그러나 충분하다 할 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어쨌든 자주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수호천사 역할을 하는 감정인 수치감마저 전혀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본문 123~124쪽 중에서

마리아는 한밤중에 신음 소리에 잠을 깼다. 꿈속인가 했는데, 그녀는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다. 다시 신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더 컸다. 마리아는 딸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기름등잔의 불빛은 방 건너편에 닿지 않았다. 어느 아이일까, 마리아는 궁금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신음을 토한 아이가 예수임을 이미 알았다. 마리아는 조용히 일어나 문의 못에서 등잔을 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아이를 하나씩 살폈다. 예수가 몸을 흔들다 돌리며, 악몽을 꾸는듯 혼자 웅얼거렸다. 아버지 꿈을 꾸는 것이 틀림없었다. 예수는 어린아이임에도 벌써 많은 고통을 지켜보았다. 죽음, 피, 고문. 마리아는 아이를 깨워 그 괴로움에서 건져낼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아들이 무슨 꿈을 꾸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가 아버지의 샌들을 신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되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다. 또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바로 그날 그 가엾은 사람의 샌들을 신다니. 마리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 자기 매트로 돌아갔다. 어쩌면 샌들 때문에, 튜닉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 요셉이 집을 떠난 뒤 감행한 운명적인 모험을 꿈 속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소년은 남자들의 세계로 진입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예수는 이미 남자들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이제 예수는 아버지의 얼마 안 되는 재산, 여러 군데 기운 튜닉과 닳아빠진 샌들, 그리고 꿈의 상속자로서 지금 지상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발걸음을 되짚고 있었다. 마리아는 아들이 다른 꿈을 꿀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본문 210~211쪽 중에서

마리아는 침대 옆에서 미적거리며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참 잘생겼네, 하지만 완벽하려면 눈을 감아야겠어. 예수는 머뭇거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순간 그는 솔로몬 왕이 한 말의 진실한 의미를 이해했다, 너의 살 오른 넓적다리는 숙련공이 공들여 만든 패물 같구나, 너의 배꼽은 섞은 술이 고여 있는 둥근 잔 같구나, 너의 허리는 나리꽃을 두른 밀단 같구나, 너의 젖가슴은 한 쌍의 사슴 같고 쌍둥이 노루 같구나. 마리아가 그의 곁에 누워 그의 손을 그녀의 몸 쪽으로 끌어당겨 그녀의 몸을 천천히 안내하자 그 말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얼굴, 목, 어깨, 젖가슴, 그는 젖가슴을 살짝 쥐었다, 이어 배, 배꼽, 아래 털, 그는 그곳에 머물며 손가락으로 털을 꼬았다 풀었다 했다, 그다음에는 부드러운 허벅지의 곡선. 그녀는 그의 손을 안내하며 작은 소리로 되풀이했다, (중략) 예수는 숨이 가빠졌다. 잠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녀의 두 손, 이마에 있던 왼손과 발목에 있던 오른손이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 손은 천천히 움직여 가운데서 만나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구나, 떠나거라, 목자는 그렇게 말했다. 누가 알랴, 그것이 예수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일지.
―본문 339~340쪽 중에서

추천사

해외 언론 리뷰

“사라마구의 작품 중 가장 까칠하고 위험하다.” ― 《뉴욕타임스》

“독창적이고, 뜨겁고, 아름다운 책.” ― 존 버트,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

“사라마구의 최고작이다. 그의 소설은 특별하고, 웅변적이고, 이단적인 텍스트로, 인간의 고난에 대한 깊은 동정심으로 가득하다.” ― 제임스 우드, 《뉴 리퍼블릭》

“이 복음서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살아 있게 만드는 이야기꾼이 쓴 것으로, 독자는 쏜살같이 밀려오는 산문의 큰 강과 함께 숨 가쁘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 마이클 파이, 《스코츠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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