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철아 장하다! 그리고 고맙다. 네가 착하게 열심히 살아와서 이런 상을 다 받는가 보다. 그동안 고생 참 많이 했지.”
너무나도 그리웠던 어머니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날 제가 받은 표창장보다도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제 등을 말없이 토닥이면서 축하의 말을 대신했습니다. 저도 속으로 울었습니다. 언제나 가족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생에서 가장 빛나는 날이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왔습니다. 표창장과 훈장을 보고 또 보시며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가슴에 새겼습니다. 전 뿌듯함으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모자를 씁니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불판 앞에 섰습니다.
- <저축상을 받던 날> 중에서
음식이란 것이 혼자 먹기가 참 애매합니다. 특히나 저는 가게가 아닌 노점을 하는 입장이고 더구나 먹는 음식을 파는 사람입니다. 학생들이 천 원짜리 버거를 먹으러 왔을 때 제가 그보다 더 비싼 밥을 그들의 눈 앞에서 시켜 먹고 있다면? 그건 좀 우스운 꼴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먹으려면 아무래도 비디오 가게 안에 들어가는 실례를 무릅쓰고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또 저 혼자 먹어서는 안 될 말이잖아요? 가게 주인이 두 명인데다가 가게 안에 늘 사람들을 불러놓고 있기를 좋아했던 터라 김밥이라도 싸면 여섯 줄 정도를 가져가도 제 입에는 서너 개 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맘 편하게 제가 만든 것을 먹어가며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사를 시작하고 3년 동안 거의 모든 끼니를 제가 만든 빵으로 해결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제가 만든 것을 같이 먹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꽤 신선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만든 버거를 수시로 먹는 모습을 보니 제품이 믿을 만하겠다” “먹을 만한가 보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 것입니다. 저는 한 끼 식사를 간편히 해결해 좋고, 학생들은 저의 그런 모습에 제품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한 개를 먹고도 양이 덜 차서 망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를 더 먹자니 너무 배부르고 안 먹자니 아무래도 부족한데…….’ 하는 표정으로 콜라가 담긴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는 학생들을 보면 저는 재빨리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 이거 나랑 반으로 나눠 먹자. 아저씨도 살짝 배고픈데 한 개까지는 배가 불러서…….” “그래도 돼요?”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입장이지만 저는 매번 학생들과 한 끼 식사를 같이 하는 셈입니다.
- <빵장수는 빵을 먹어야 한다> 중에서
저를 본래의 저보다 훨씬 더 좋게 봐주고 도움을 베푼 학생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저는 받은 만큼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학생들이 제게 보여준 관심과 애정을 조금이라도 되돌려주고 싶었지요. 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그들, 또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저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던 학생들에게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부한 돈으로 <영철 street 버거 장학금>이 만들어졌고, 성적은 우수하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매년 전해지고 있습니다.
돈을 송금하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기분 좋게 하루 장사를 했지요. 그런데 저녁때쯤 되었을까? 양복을 입은 중년의 신사 분들이 저희 가게에 들어섰습니다. 가게에서 버거를 먹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에 봤더니 고려대 어윤대 총장님과 교직원 분들이셨지요. 저는 깜짝 놀라 불판에 손을 델 뻔했습니다. 앞치마를 벗을 새도 없이 총장님이 내미시는 손을 맞잡았지요.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고대생들에게 잘 해주신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버신 돈으로 그렇게 크고 훌륭한 마음을 베풀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감격했습니다. 장학금을 기부하는 사람이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하물며 고려대학교 총장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명망, 학식을 지니신 분이 저 같은 사람을 찾아와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