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현장에 나가본 시나리오 작가는 안다. 자신이 무심코 써넣은 단 한 줄의 지문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엄청난 중노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자책감 때문에 가슴이 졸아든다. 불필요한 혼란과 노동을 야기하지 않으려면 건축물의 설계도면을 방불케 할 만큼 냉정하고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시나리오다.
-<1. 시나리오를 다시 정의하라> 중에서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수적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훗날 추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라도 데생과 콤포지션은 중요하다. 신경숙이 아니꼬우면 조세희 베껴 쓰기부터 시작해야 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시나리오가 우스워 보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는 있다.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당장 시작할 일은 어니스트 레먼의 시나리오부터 베껴 쓰는 것이다.
-<2. 베낄 수 없다면 쓰지 마라> 중에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어떤 내용인지를 5분 안에 설명하는 것, 그것이 피칭(pitching)이다. 누구에게? 물론 그 시나리오를 구입하거나 채택할 수도 있을 만한 제작자나 감독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세일즈 기술이다. 당신은 자신이 만든 상품(시나리오)을 소비자(제작자나 감독)에게 팔아야 한다. 그럴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상품의 핵심적 내용에 대한 정확한 소개, 소비자가 그것을 구입했을 때 얻게 되는 구체적 이익에 대한 비전의 제시, 그리고 순식간에 상대방의 혼을 쑥 빼어놓을 만한 멋진 화술.
-<3. 단번에 스트라이크를 던져라> 중에서
<매트릭스>의 1장은?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가 네오(키애누 리브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내놓으며 각각의 약을 선택했을 경우 그가 겪게 될 전혀 판이한 현실(매트릭스-현실)을 설명한다. 네오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굳이 빨간 약을 택한다. 그리고는 걷잡을 수도 수긍할 수도 없는 ‘이상한 현실’ 속으로 빨려든다.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2장의 끝은? 모피어스가 자신은 '구세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 네오가 "내가 비록 구세주는 아니지만 모피어스는 구해야만 한다"고 결심하고 매트릭스 속으로 돌진하는 장면까지다. 각각의 장에 소모된 시간은? 여러분이 직접 스톱워치를 가지고 재어보라. 거의 정확하게 1:2:1이다. 가장 '신세대적'이며 '포스트 모던'하다고 평가받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가장 '구닥다리'이고 '고리타분한 클래식'으로 손꼽히는 3장 구조를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 <7. 필요에 따라 변형되는 3장 구조> 중에서
수동적인 주인공을 내세워도 드라마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버겁다. 우 형사가 등장하면 장면을 만들기가 쉽다. 그는 끊임없이 부딪치고 스스로 사건을 만들면서 장면을 이끌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민이 등장하면 장면 만들기가 어렵다. 그는 누군가의 액션이 있어야 리액션을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주인공을 내세우면 드라마를 주도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수동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드라마에 끌려가야만 하는가? 사랑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인물보다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인물을 그리기가 쉬운 법이다.
-<8. 주인공은 ‘졸라’ 설쳐야 돼> 중에서
대사와 지문에 대한 나의 태도는 이렇다. “대사가 지문보다 많으면 그것은 시나리오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희곡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대본에 가까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 간략한 지문을 구사하면서 대사는 그것보다 더 적어야 한다고? 그렇다! 어떤 장면은 열 줄의 지문과 한 줄의 대사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시나리오다. 하지만 한 줄의 지문과 열 줄의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시나리오가 아니다.
-<20. 대사는 작가의 시> 중에서
로버트 맥기는 말한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나는 말한다. “초고는 버리려고 쓴다.” 하지만 쓰레기를 만들고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초고를 쓰는 사람은 없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초고는 대개 쓰레기로 판명되고 만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판명’이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판명하기 위해서도 초고는 대단히 중요하다. 당신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는 그냥 아이디어일 뿐이다. 먼 곳에 있는 친구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사촌이 낫다.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있는 빼어난 아이디어보다는 시나리오의 형태로 씌어져 있는 허섭한 한 신이 낫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