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노인의 목소리는 평소나 다름없었지만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용주사란 절에 갔더니 사십구재를 하고 있어서, 내일 아침 다른 절을 찾아가보려고 한다는 얘기였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잠자기 전에 양치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큰방에서는 쉬지 않고 두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욕실 문을 꼭 닫고 욕조에 걸터앉아 천천히 심호흡하듯 이를 닦기 시작했다. 입안에 거품이 하나 가득 고일 무렵 그녀는 벼락 치듯 거품을 뱉어내고 그 입으로 전화통 앞으로 달려갔다. 구차해, 그만두자. 송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리다 말고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침이 아니라 치약이었다.
-「이상한 결혼식」 중에서
하얀 장미꽃을 한 아름 안고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가슴이 뛰었다. 다음 순간 철컹 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그녀의 뛰는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다. 문을 닫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안에서 차르륵 하는 쇳소리와 현관문 잠금 쇠 푸는 소리가 또 한 차례 찬물을 끼얹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이 여러 겹의 육중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오싹 소름이 끼치도록 낯설었다. (……) 그녀 앞에 나타난 그는 그녀의 연인도, 얼마 전 절에서 식을 올린 나이든 신랑도 아니었다. 그는 거북처럼 오랜 자기 집을 무겁게 짊어진 한 노인이었다. 그 집의 모든 것, 소파·가구들·벽의 그림들·도자기들·전화기 하다못해 탁자 위의 파리채까지도 그가 짊어진 집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를 만나러 오면서 가슴이 뛰었다는 사실이 스스로 무안스러워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애가 탄 나머지 양쪽 턱 밑으로 땀이 흘러 갓끈을 맨 것처럼 보이던 그 남자는 이 집의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는 생이 만든 신기루였을까.
-「반야심경」 중에서
전처의 다리에 손이 닿는 순간, 그녀에겐 이상하도록 그 살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혹시 우리는 전생에 모녀 사이였나요? 희고 부드러우나, 탄력이 사라진 살집에 손가락으로 힘을 주며 그녀는 생각했다. (……) 갑자기 자신이 그에게 품고 있는 사랑의 감정이 먼 과거의 일처럼 비현실로 느껴졌다. 그 대신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 사람, 손가락이 부은 듯 통통하고, 염색한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고, 팔뚝 안쪽에 좀체 낫지 않는 오랜 부스럼이 있는,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이 나이든 여자에게 느끼는 진한 연민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다리를 주무르는 손길에 점점 정성이 담기는 것과 반비례하여, 그녀의 마음에서 그는 모르는 타인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혈육」 중에서
아내는 반신반의하며 남편이 망보고 있던 자리로 가서 뜰을 내다보았다. 불을 밝힌 외등이 뜰을 비추고 있으나, 담 밑으론 나무 그림자가 검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 그림자는 침입자의 흔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아녜요. 나무 그림자예요.”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노인은 그녀를 잡아끌며 안방으로 갔다. 손에 들고 있던 문제의 장칼로 그가 다시 안방 창문의 커튼을 조금 들추고 감나무 밑 대나무 숲을 가리켰다. 부릅뜬 눈으로 다시 보아도 그것은 늘상 감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던 그 그림자였다. 그녀는 그 두려움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제가 뜰에 나가서 둘러보고 올게요.”
그러자 노인의 손이 아내의 어깨를 왈칵 붙잡았다. 그녀는 못 이기는 체 어깨를 잡히어 가만히 있었다. 남편의 맘이, 다급하게 잡은 손을 통해 가슴에 깊이 설움처럼 새겨졌다.
-「야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