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물건을 넘기고 받는 절차가 세련되고도 숙달된 솜씨로 끝났다. 그는 이제 아무 느낌도 없었다. 무수히 되풀이되어 온 절차였다. 1년 전 새벽녘에 서너 명의 바바리 코트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순간부터 자신은 물건이 되었다. 취급 주의가 필요 없는 화물이 되어 아무 차에나 마구 실렸고 아무 곳에나 마구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자신이 물건이 아니게 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 어떤 탁월한 노력을 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용납되지가 않았다. 물건이 아닐 수 있는, 그가 발견한 유일한 방법은 강철 같은 침묵을 지니는 것뿐이었다. “이쪽으로!” 느낌이 다른 손이 팔짱을 끼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발을 옮겼다.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다시 드르륵 문이 열렸다. 냉기가 왈칵 끼쳐왔다. 그는 숨을 추슬렀다. 그리고 언뜻 자신의 형기를 떠올렸다. 무기……. 조금 전까지 맛보았던 그 짧은 동안의 온기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금니를 꽉 맞물며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를 확인했다. 아직도 시퍼런 나이였다. 시간은 역사를 만들어내고 세월은 역사를 지배한다. 시간은 인간을 생존케 하고 세월은 인간을 데려간다. 그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다.
“뭘 그러고 앉았니? 살아났으니까 빨랑 밥이나 먹어치워.” 이런 일을 몇 차례 당해본 것처럼 진길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 경찰에 알려야 해.” 동호는 이빨을 앙다물며 숟가락을 소리가 나게 놓았다. “캬아, 이거 사람 웃기는데. 너 폼 좀 그만 써라. 경찰이 뭐 파리 잡고 있는 줄 아니? 경찰은 사람들 일만 쫓아다니기에도 똥줄이 탄다 그런 말씀야. 알아들어?” “그치만 이건…….” “운수에 번갯불 쳐서 경찰이 나섰다 치자. 그것들이 널 점원으로 쓴 일이 없다고 인상 싹 뒤집어까면 어쩔래? 증인이 있다고? 너하고 그것들하고 누가 더 쎄니? 너나 나나 양아치야. 넌 서울물 말짱 헛먹었어. 너 그렇게 빽 한번 뻐근하다면 왜 철제소 주인한테 얻어터지고도 가만히 있었고, 중국집에서 당하고는 왜 또 죽치고 있었니? 넌 지금 또 두 달 치 월급 생각이 간절하겠지? 싹 잊어버려. 재수 없는 놈은 비행기 타도 독사 물리는 법이야.” 진길이는 모든 걸 훤히 알고 있는 것같이 당당했다. 동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화론」 중에서
“아주먼네 윗집에서 초상이 난 모양이죠?” 한 여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불쑥 물었고, “그렇다니까요, 글쎄. 요런 쥐콧구멍만 한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은 것도 죽은 거지만, 아무래도 사흘장(葬)은 치를 것 아녜요. 이 삼복더위에 시체가 좀 잘…….” 여자는 여기서 말을 뚝 끊으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 다음의 말인 ‘……썩겠어요’를 입 밖에 내기는 끔찍한 모양이었다. “죽은 사람은 누구래요?” 또 한 여자가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이거 참 큰 야단났네. 시체를 이고 어떻게 잠을 자고 어떻게 밥을 먹나 그래. 재수가 없을래니까 별일이 다 생기네.” 금방 시체에서 썩은 물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이 여자는 계속 진저리를 치며 아예 말대꾸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세 여자는 비로소 자기들 바로 위층에 시체가 누워 있다는 가정을 제각기 실감하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잠을 자고,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