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다가 나는 어떻게 될까. 아버지 같은 가난한 농사꾼 술주정뱅이…….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공부를 많이 배워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종일 힘겨운 일에 시달리면서도 이런 생각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논에 거름을 지고 나가다가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내 눈앞에는 긴 꼬리를 단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서울로 가자!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이었다.
죽든 살든 서울로 가자. 머슴살이를 하느니 서울 구경이나 한번 하고 죽자. 서울은 애들 일자리도 많다는데 머슴살이하는 만큼 일을 하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악착같이 일하다 보면 배울 길이 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자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것 같았고,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자연 공부」 중에서
동일이 자신의 차를 갖기 원한 것은 스스로가 정한 성공의 제1단계 목표였다. 그 1단계 성공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고향에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다. 매일 입금액에 쫓기는 월급 없는 월급쟁이의 초라한 신세로 고향 땅을 밟고 싶지가 않았다. 자기 차를 가진 어엿한 차주로서 당당하게 고향엘 가리라 했다.
동일에게 있어 고향이란 일반적인 느낌과는 판이한 곳이었다. 어떤 살붙이나 먼 친척 같은 것도 없었다. 있다면 한(恨)이, 세월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시퍼렇거나 시뻘겋게 채색된 한만이 고향을 향해 드러나 있었다.
고향 하면 뼈저린 가난이 떠올랐고, 준열이가 떠올랐고, 동일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건 뼈에 사무치는 굴욕이었다. 견디어내기 어려운 짓밟힘이었다. 철이 들면서 가슴속에서 돌덩어리가 들어앉기 시작했다. 반드시 받은 만큼 갚아주리라는 결심이었다. 그 복수심은 기묘한 힘으로 동일을 흥분시키고 긴장하게 만들었다. 으레 사람의 마음먹음은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허물어지게 마련이건만 동일의 가슴에 자리 잡은 복수심은 그 반대였다. 하는 일이 짜증스럽고 싫증이 나다가도 준열이에게 당했던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불현듯 힘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길이 다른 강」 중에서
고향 사람들, 특히 정씨 문중 사람들에게는 자신은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자신의 생존을 알고 있는 것은 황 서방 내외뿐이다. 입 무거운 황 서방이 자신의 생존을 입 밖에 낼 리가 없었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인 것이다. 이제 고향에 남은 자신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만석은 나흘 동안 앓아누워서 자신의 신세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참 허망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소작 농사꾼에서 떠돌이 막노동꾼으로 바뀐 것이었다.
만석은 다시는 고향 땅 가까이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심은 30년이 가깝도록 지켜져 왔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판이 벌어져도 고향 쪽이면 아예 외면을 해버렸다.
강변에는 저녁 안개가 어떤 슬픔의 흔적처럼 자욱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무거운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선 영감은 오래전부터 갈대숲으로 번지는 안개의 꿈틀거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저 갈숲에는 참게가 그리도 많을까. 어렸을 적에는 구워먹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술안주로 그만이었지. 소주 한잔을 꺾고 진간장에 담근 그 털북숭이 참게 다리를 씹는 맛이란…….
―「유형의 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