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 / 비 오는 날 파밭을 지나다 보면 생각난다. / 무언가 두고 온 그리움이 있다는 것일까. / 그대는 하이얀 파꽃으로 흔들리다가 / 떠나는 건 모두 다 비가 되는 것이라고 / 조용히 조용히 내 안에 와 불러보지만 /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 망설이며 뒤를 돌아보면서도 / 입 밖에 그 말 한 마디 하지를 못했다. / 가야할 길은 먼데 / 또 다시 돌아올 길은 기약 없으므로 / 저토록 자욱이 비안개 피어오르는 들판 끝에서 / 이제야 내가 왜 젖어서 날지 못하는가를 / 알게 되었다. / 어디선가 낮닭이 울더라도 새벽이 오기에는 / 내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므로 / 네가 부르는 메아리 소리에도 / 난 사랑이란 말을 / 가슴 속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전문
바다의 왕자였던 조기 한 마리가 굴비 두름으로 엮인 채 어느 구석진 곳간에 걸려 있다. 하나 둘씩 끈에 엮여진 굴비들이 모두들 빠져나간 뒤, 맨 마지막 끝에 남은 이 굴비를, 주인은 까마득히 잊은 듯, 햇살 희미한 어둔 곳간에서, 백 년 동안을 말라 있다. 그러나 굴비는 이따금씩,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조용히, 마른 몸 흔들어 그네를 탄다.
이 굴비의, 백 년 동안의 고독한 그네타기. 바람만 알맞게 불어준다면, 굴비는 자신을 엮은 끈이 삭아서 끊어질 때까지, 그네타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네를 타면서 그는, 화석이 된 먼 바다의 파도소리를 귀담아 들을 것이다.
―「백 년 동안의 그네타기」 전문
밥에서 풀이 돋기 시작하는구나. // 바람을 일으키는 자 있어 / 밖에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 / 밥상에 앉아, 모락모락 김 솟는 밥상머리에 앉아 / 어머니 / 밖에다 귀 기울인 채 밥에게 말하네. // 이제 풀이 돋으면 어쩌지? / 네 언제 자라, 나락을 까불어 먹겠느냐? / 한참 동안 어머닌 / 부엌 뙤창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으며 / 보살처럼 앉아 있는데 / 따뜻한 밥은 해가 져도 김이 스러지지 않을 것 같다. / 밖엔, 모래알 쓸리는 봄 / 그게 꼭 밥알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아 / 나조차 바깥에 귀를 기울이는데 // 거기, 어머니의 기억들이 몽땅 쓸려가 버리는데 / 난 어쩌지? / 이제 밥에 풀이 돋기 시작하는데...
―「밥풀」 전문
씨알 하나가 저토록 아름다운 절망을 / 피워낼 수 있다니 / 난 스무 날 책을 읽어도 모르겠어. / 보랏빛으로 잠들 수 없음을 / 모르겠어. / 영혼이란, 악마가 만들어낸 작은 벌레야 / 라고 하더라도 / 아직은 무엇 하나 지울 수 없으매 / 호박잎에 모인 빗방울이 왜 그리운 건지 / 모르겠어. / 스무 날 책을 읽어도 모르겠어.
―「스무 날 책을 읽어도」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