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미묘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이자 명상의 도구죠. 그런데도 어리석은 중생들은 불상을 부처님의 화신(化身)으로 생각하고는 그 앞에 넙죽 엎드려서 만복을 요구하거나 각종 소원을 빌지요. 하지만 그것은 탐욕을 일으키는 일이자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며 죄업을 쌓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불상이나 불화는 모두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삼매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상이나 불화로부터는 새벽 별빛 같은 삼매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탄트라불교에서는 ‘얀트라(Yantra)’라고 합니다. 불상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거나 절을 하는 것은 그 독특한 삼매 에너지의 사이클과 수행자 자신의 에너지를 일치시키기 위함입니다.
수행자들이 절을 하는 것은 우상을 향해 소원을 빌거나 육신의 건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마음의 죽음’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삼매란 곧 ‘마음이 죽은 뒤에 찾아오는 새로운 새벽’을 의미하지요.
가톨릭 신부들이 서품을 받을 때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땅바닥에 몸을 던지는 것은 세속적인 삶의 죽음을 의미하며, 다시 땅에서 일어나는 것은 신의 아들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상 수행자들이 절을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1장 혼돈을 넘어서> 중에서
선이나 탄트라에서는 마음에게 간섭을 하는 것이 곧 집착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초월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거나 뜯어고친다고 하여도 결국 그 마음은 역시 똑같은 마음일 뿐이라는 뜻이지요.
흔히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고 말하는데, 마음은 아무리 고쳐먹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로 가지고 나가도 여전히 줄줄 물이 샐 뿐이지요. 아무리 무대를 바꾸더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전염병처럼 창궐할 뿐입니다.
사실 마음에는 일부러 점화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이미 고통과 괴로움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선가에서는 그것을 불타고 있는 묘지 또는 불타고 있는 집이라 하여 화택(火宅)이라고 부릅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한가운데서 버티고 서서 아무리 혁신을 외치며 수없이 마음을 바꿔먹는다고 하여도 그 불을 꺼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2장 해도 부처 달도 부처> 중에서
우리가 촛불을 바라보며 명상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촛불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생각으로만 촛불을 바라보고 있을 뿐, 거기에 ‘바라보고 있는 자[觀照者]’는 부재(不在)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생각에 이끌려서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촛불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저 천만 리 밖에 있는 동굴에서 아리따운 금발의 아가씨와 살림을 차리고 있는 중이죠.
그런데 촛불을 바라보고 있는 자와 촛불 사이에 마음의 흐름이 정지해 버렸다면, 촛불을 바라보고 있던 그 ‘바라봄[觀照]’의 에너지는 뒤로 튕겨져 나와서, 바라보고 있던 자에게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소위 오라(aura)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선에는 ‘등불이 켜졌다’라고 합니다. 그 빛은 관조가 깊어질수록 더욱 더 밝아져 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붓다들의 광배(光背)는 이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빛은 마음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속삭이는 소리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중략)
만약에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소경이 등불을 들고 밤길을 가며 빛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4장 묘하게 밝은 바탕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중에서
단독 수행자는 타인을 추종하거나 타인을 예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오직 자신을 믿는 자이죠.
탄트라 명상은 바깥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명상을 하는 사람이 몇 명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자신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사들은 명상 도중에 붓다를 만나면, 즉각적으로 그 붓다를 죽여버리라고 합니다.
스승들은 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붓다라는 바깥의 이상형을 따르게 되면, 자기 자신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자신을 잃는 것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신비로운 세계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전인미답의 세계는 자신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죠.
―<5장 고독한 삶의 여행자들을 위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