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추억 만들기다. 그 추억을 섬세하게 그리고 오롯하게 엮어낼 수 있는 것이 사진이다. 작가로서의 삶을 70을 넘겨 그 중반으로 가고 있으면서 이제는 추억을 더듬을 만한 세월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들을 간추리고, 그 아래 설명 아닌 ‘추억’의 조각들을 짜맞추려고 해보았다.
몇 년 전에 엮었던 『황홀한 글감옥』이 글로 보는 ‘조정래’의 자서전이라면, 이번의 『길』은 사진으로 보는 자서전이 아닐까 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던 동국대학교 문학의 밤에서 시 낭독. 재학생 중에 이미 기성 시인이 된 사람이 네댓씩이나 있었던 상황에서 1학년에게 할애된 자리는 단 하나. 거기에 뽑혀 시 낭독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그래서 형의 양복도 빌려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깎고. <1962>
—「청춘의 빛과 그늘」 중에서
『아리랑』을 위한 러시아 연해주 취재. 러시아 취재가 늦어진 것은 국교가 수립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연해주는 우리 동포 20여만 명이 살았던 땅으로 중요한 독립 운동 기지였다. 그분들은 독립 투쟁에 직접 나서는 한편 독립 자금을 꾸준히 모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으로 대표되는 ‘고려인(러시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들은 극동의 황무지를 개간해 논밭을 일구는 고단하고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놓아도 살아난다”, “고려인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1937년 11월 말부터 한 달 동안 20여만의 동포들은 중앙아시아의 불모의 땅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대수난을 겪게 된다. 절반 가까이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총 맞아 죽은 그 사건은 약소민족이 겪어야 했던 참극이었다. 그 모든 것을 쓰기 위해 연해주를 찾아간 것이다. 추위를 피한다고 3월에 갔지만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강은 꽁꽁 얼어 있었고, 눈은 발목을 넘게 쌓여 있었다. 사진 왼쪽이 중국 국경이다. <1993>
—「즐거운 지옥, 소설 속으로의 함몰」 중에서
평생 앉아서 글을 쓴 업보로 내장을 받치고 있는 막이 터져 탈장수술을 받은 것이 2002년 1월이었다. 그 후 어떤 위험스런 상황에 부딪힐 때면 순간적으로 신경이 수술 자리로 집중되고는 했다. 그 부분이 부실해져 생기는 본능적 방어 작용인 거였다. 그런 몸으로 어쩌자고 손자만 만나면 그리도 업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손자가 업어달라고 졸라도 업어주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데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만날 때마다 “재면아, 할아버지가 업어줄까?” 하고 자청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재면이가 업히며 꼭 나누었던 대화. “하부지, 힘드더?” “아아니.” “왜에에?” “우리 재면이가 예쁘니까.” 그러면 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재면이는 사진에서처럼 한없이 그윽하고 만족스럽게 웃고는 했다. 그 정 나눔이 좋아 허리가 아파 끙끙대면서도 만날 때마다 업어주기를 자청했다. 그 ‘손자 바보’가 되는 것이 말년 인생의 가장 큰 복이었고, 글 쓰는 피곤을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주는 최고의 피로회복제였다. <2003>
—「문학의 강은 오늘도 흐른다」 중에서
『태백산맥』 필사는 아들과 며느리만 한 것이 아니다. 그 뒤를 따라서 독자들도 옮겨 베껴쓰기를 한 것이다. 그것을 기증 받아 태백산맥문학관의 문학사랑방에 여섯 사람의 필사본을 전시했다. 그런데 지금 또 필사하고 있는 독자들이 있으니 앞으로 그 수가 얼마가 될지 알 수가 없다. <2014>
—「문학의 강은 오늘도 흐른다」 중에서
우리들은 더러 독하다는 표현으로 ‘바늘로 찔러서 피 한방울 나지 않을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소설에 있어서는 최소한 그의 이마에 바늘을 찔렀다가는 도리어 바늘이 부러질 거라고 나는 말하겠다. 금방 자고 일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칼, 명베를 꽉 틀어짠 것 같은 물기 없는 얼굴빛, 그리고 아무 데서나 눈을 감았다 하면 잠 속으로 떨어지는 수부 같은 습성 하며, 보통 눈으로 볼 때는 그렇고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소설과 사회, 민족과 사상, 정의와 인간을 토할 때면 쑥과 마늘을 씹어 먹고 동굴 속에 들어앉은 곰처럼 참아내기 어려운 뜨거운 기운이 훅훅 끼쳐드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나는 언젠가 작가 조정래 씨의 이마를 보면서 ‘그래, 빨랫돌 같아’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차라리 소금 걸레라고 해야 할, 그리고 피에 젖어온 민중들의 서답에 얽힌 사연이 골골이 새겨져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의 작업이 풀릴 수 있었겠는가.
—정채봉, 「쑥내음과 마늘 기운이 누구보다도 강한, 조선솔과 같은 사람」 중에서
『태백산맥』은 민족 분단을 고정화시킨 6·25전쟁을 작품 내용의 절정단계에 배치함으로써 해방 직후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민족 내부의 계급적 모순이 이 전쟁을 통해 어떻게 폭발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 가운데에서 분단 문제와 연관하여 새롭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핵심적인 요소는 이념적 금기지대를 넘어서면서 분단 상황의 객관적인 인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여순반란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활동 등으로 이어지는 좌익운동의 실상을 그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는 이 작품은 6·25전쟁의 비극성을 우리 민족 내부의 모순을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시켜 놓고 있다. 좌익운동의 실상이 대부분 정치적 상황에 의해 은폐되어 버린 점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에서 사실의 소설적 복원과 그 객관적인 제시로 개방성의 의미를 넉넉히 음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은 이 작품만이 지니고 있는 소설적 미덕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태백산맥』은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그 대립의 실상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은 이념 논쟁으로만 끌고 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권영민, 「조정래와 분단 극복의 문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