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산을 오른 산사람들이 읽고 쓴 삶의 기록
어릴 때는 청춘을 ‘산 따위’에 걸었다는 사람들의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알았다면 부러워했을 것이다. 화염병이 난무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청춘을 보낸 세대들에게 산은 너무 높고 고고해서 이 세상 사람들의 것이 아닌 신기루처럼 보였으니까.
우에무라 나오미의『내 청춘 산에 걸고』를 처음 만난 것은 청춘을 다 보낸 뒤였다. 산 좋아하는 애인이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된 다음, 책꽂이에서 산악 도서들이 점점 세를 불려가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 책은 유독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정작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은 한왕용 때문이었다.
내가 만나는 남자들은 자신이 가 닿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나오미가 산을 향해 오로지 ‘돌격 앞으로!’ 나아가는 대책 없는 열정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왕용은 나오미란 사내를 좀 다르게 읽고 있었다. 오히려 그를 자극한 것은 나오미가 추구한 극한의 모험보다는 산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의 공사판, 캘리포니아의 포도 농장, 알프스의 스키장 잡부로 전전긍긍하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했다. 그는 산에서도 인생에서도 무임승차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단독 등정에 몹시 끌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작은 등산이라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여 혼자서 행동한다면 그야말로 진정 흐뭇한 등산이 아니겠는가.” ―『내 청춘 산에 걸고』 74쪽
― <산이 자꾸 내 앞의 산을 가린다> 중에서
대지에 발이 묶인 여자들이 쉽게 다다를 수 없는 세계에 도달한 존재로서 강렬한 상징이던 고미영이 생에 가장 높고 춥고 외로운 바람 앞에서 죽었다. 그의 얼어붙은 몸뚱이는 낭가파르바트 캠프 1 오른쪽, 메스너 루트 100미터 위쪽에서 발견됐는데 정상을 바라본 채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메스너 루트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 때문인지, 그의 식어버린 몸뚱이가 세상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19세기식 ‘정복을 위한 등반’에서 21세기의 ‘존재를 위한 등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알피니즘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미영이 떠난 뒤에도, ‘정상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에는 쉽게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등산의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다. 최고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부채질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고미영이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바라보고 누운 채로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만큼은 어떤 수도자보다도 충만한 영혼의 고양을 느꼈으리라 믿고 싶다. 세상이 아무리 조급하게 등 떠밀었다 해도 그 여자는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의 부고는 가장 높은 산이란 높이와 상관없이 못다 오른 산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 <나의 본상을 마주하기 위하여 높고 외로운 생의 북쪽으로 가다> 중에서
2007년, 혈육보다 끈끈한 정으로 동고동락하던 후배를 관에 얼린 채로 데려와야 했던 박영석은 삭발을 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며 공항에 나타났다. 그런데 2011년, 꼭 그런 낯빛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눈사태에 파묻힌 시신은 찾지도 못한 채 유품만 겨우 수습해 돌아온 박영석 원정대의 살아남은 대원들이 4년 전 그들 대장과 똑같았다. 사고 수습을 위해 네팔로 떠났다가 활짝 웃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만 안고 돌아오던 그의 아들은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이라 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 박영석은 아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산악 그랜드슬램을 마치기 전에 썼던 그의 책 『산악인 박영석 대장의 끝없는 도전』에서 “첫째를 낳았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둘째가 생긴 후부터는 산이 두려워졌다.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것이기에 더 소중한 나의 목숨이었다. 죽더라도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아버지 노릇을 더 하고 죽고 싶었다”라고 했는데. 이제 그의 아들들은 겨우 열다섯과 스무 살이 되었을 뿐이다.
남극점에 도달한 최초의 탐험대라는 훈장 대신 꽁꽁 언 일기장을 남긴 스콧은 평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죽음은 자신이 원하던 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석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박영석과 대원들, 또 그들보다 먼저 산에서 죽은 이들의 가족에게 스콧이 아내에게 한 마지막 말이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 <일상의 위도로 돌아오기 위하여 정상을 향하다> 중에서
스무 살 즈음 나는 애인에게 작은 배낭을 선물 받았다. 그 배낭이 제 몫을 하게 된 것은 선물받은 지 10년도 더 지났을 때였다. 아이들이 제법 자랐을 때 내가 등산학교에서 암벽 등반을 배웠기 때문이다. 처음 바위 맛을 본 뒤로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손끝에서 화강암의 촉감이 살아나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강사들로부터 핀잔을 듣던 ‘몸치 아줌마’였다.
그래도 좋았다. 아득하고 아찔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순간, 바위에 매달려 오들오들 떨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태연하게 벼랑을 기어오르는 개미만도 못하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오히려 행복했다. 껍질을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랄까.
그 무렵 이성부의『야간산행』을 처음 읽었다. 그가 젊은 날 펴낸『우리들의 양식』이나『백제행』이 ‘벼’들이 서로에게 기대고 어우러져 사는 ‘들판의 시’였다면,『야간산행』은 묵묵히 산을 오르는 일과 시작(詩作)이 일치되기 시작한 ‘산의 시’였다. 특히 그가 암벽 등반에 몰두하던 시절의 가슴 뜨거운 시편들이 나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가 맡은 ‘낯선 정신의 냄새’는 나를 흔들어놓았다. ‘상처를 지니고서야’ 바위에 이르는 길을 알았다는 말은 마치 나를 위한 고백처럼 들렸다. 이성부의 시가 있었기에 나는 뒤늦게 산에 빠져드는 일이 온전히 ‘좋은 일’로만 여겨졌다. ― <상처를 지니고서야 바위에 이르는 길을 알았다> 중에서
『등산』과『등산: 마운티니어링』은 한목소리로 선배들의 실패와 성공의 경험 모두로부터 배우라고 강조한다. 안전을 위해 ‘경험에서 배워라, 객관적 위험 요소를 고려하라, 수용 가능한 위험의 범위를 가늠하라, 올바른 판단력을 길러라’라는 지침들이 비단 등산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스승을 찾는 일이나 자녀를 바르게 키우고자 애쓰는 부모의 역할로도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내게도 등산은 인생을 배우는 공부였다. 아기가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엄마 품에서 독립을 시작하듯, 산의 자유를 찾아가는 길도 걷기부터 다시 배웠다. 산에서 무엇을 어떻게 입고 먹고 자야 하는지 당연하게 생각하던 의식주마저도 새로 익혔다. 산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위험을 간직하고 있지만 스스로 그것에 직면하기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도 마찬가지 아닌가. ― <등산학교는 인생학교> 중에서
‘청춘의 샘’을 갈망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한결같은 꿈이었다. 진시황이 불로초 찾던 것처럼,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신대륙에 발을 디딘 것도 청춘의 샘을 찾으라는 스페인 왕의 명령 때문이었다고 한다. 중세 독일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그림에도 ‘청춘의 샘’이 있다. 과연 현실에도 그런 샘이 있을까.
책장에서 기도 라머의 책『청춘의 샘』을 꺼냈다. 사람들은 산에서 그 샘을 발견하려는 것일까. 인파로 북적이는 북한산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노인 인구는 갈수록 늘어갈 텐데, 등산이 청춘의 샘이 되어 젊음을 조금이라도 연장해 줄 수 있다면 그 나름 의미가 있으려니.
그런데『청춘의 샘』을 읽다 보니 예전에는 책장을 조금 뒤적이다 그냥 덮어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청춘’이라는 말이 조금도 애틋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지금보다는 젊었고 그래서 건방졌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제법 많은 부분 밑줄을 그으며 몰두 할 수 있었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산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냉철한 눈으로 샅샅이 살펴본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대자연의 무한한 힘을 찬양하는 성스러운 축전을 베푸는 것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예술작품을 그대의 가슴속에 기쁘게 맞아들이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청춘의 샘』75쪽 ― <알피니즘은 불로초인가> 중에서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탓일까, 섬광처럼 떠오른 것이『하늘 오르는 길』이었다. ‘히말라야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98년 우리 산악계의 전설이 된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에서 죽은 세 사람의 꿈에 대한 기록이자, 절반이 죽은 그 원정대에서 살아남은, 사진작가 손재식의 기록이다.
세 친구는 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첫 북벽 등정에 성공한 헝가리 등반대가 ‘자살 구간’이라며 우회했던 무시무시한 블랙 타워에 도달했다. 하지만 1998년 9월 28일 오후 다섯 시경, 한 시간 가까이 북벽 상단에 구름 띠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구름이 걷힌 뒤, 세 명의 대원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무려 1,300미터를 추락했다.
온몸으로 한 땀 한 땀 절벽 위에 수를 놓듯이, 자벌레처럼 기어 올라갔을 거대한 벽이지만 추락은 찰나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 순간 차안과 피안 사이의 아득하던 길이 단숨에 열리지 않았을까. 벽 앞에 몸을 맡긴 거벽 등반가들을 떠올릴 때마다 선승들의 면벽수행이 떠오르곤 했다. 높고 추운 벽에 가느다란 로프와 죽음 앞에선 쇠꼬챙이 불과한 장비에 서로의 목숨을 의지했던 세 친구, 그들의 마지막 앞에서 손재식 역시 석가모니의 구도행을 떠올린다.
― <생명은 저마다의 하늘을 오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