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을 때,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짧은 순간 순간의 행복이 나에게라고 왜 없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 또한 짧은 순간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라기보다는 기쁨이라고 말해야 할 그런 순간들입니다. 그리고 짧은 순간의 그 기쁨이 모여서 조금은 ‘아, 행복하다’ 하는 그 추상명사를 느끼게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이란 행복이라는 그 얼굴을 알 수 없는 이름과는 처음부터 인연이 없는 시간들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나는 늘 그래 왔습니다. 살아가는 일이란, 아니 우리가 무언가 일을 한다는 그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의미와 영향력.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가, 할 수 있다면 크고 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가지는 영향력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향력을 가지는 것일까. 이 두 가지, 의미와 영향력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조금은 행복해합니다.
─<행복> 중에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우리는 늘 그런 생각 속에 묻혀 삽니다. 지나간 한 해가 그랬듯이 또 다가오는 한 해를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것,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인가 하는 공간도,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하는 사람도 아닌,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끊임없는 물음이 아닐까요.
어디여도 좋습니다. 누구와 함께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을 하며 사는가 하는, 작지만 단단한 물음은 아닐까요. 그리고 거기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 <누구와, 어디로, 무엇을> 중에서
나 자신도 때때로 묻습니다. 내가 쓰는 글이 정말로 아침마다 내가 이를 닦는 칫솔만한 사회성이나 유용함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새벽 2시, 아니면 3시 …… 글을 쓰다가 지치고 지쳐서 이층 서재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다 잠들어 있을 시간입니다. 왜 나는 이 시간에 깨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시간에 잠들지 못하고 만들어내는 이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읽는 사람들의 가슴 어디만큼이나 가닿는 것일까?
칫솔은 주인의 이를 깨끗이 닦아주면서 상쾌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솔이 문드러지면 이제는 이를 닦는 일에서 벗어나 운동화라도 빠는 일에 쓰입니다. 그러다가 그나마 자루라도 부러지면 이제는 수챗구멍의 뚜껑을 꺼내는 데까지 쓰입니다.
칫솔의 생애처럼 주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그 쓰임새 …… 내 글이 과연 그만한 효용성이 있는 것일까 묻게 되는 이 자괴감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어찌 칫솔뿐이겠습니까. 소를 보십시오. 소처럼, 살아서는 주인을 위해 일을 하고 자신의 젖으로 사람을 기르기까지 하면서, 죽어서는 그 뼈에서 가죽까지를 또 사람에게 바치는 동물. 소는 그렇습니다. 꼬리까지도 사람에게 바쳐서 고아 먹입니다.
우리의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한평생이 소나 칫솔만한 의미와 영향, 그리고 남에게 대한 바침이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또 무엇하러 이 삶 위에 글이라는 이름의 허위를 놓으려 하시나요? 이렇게 묻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삶을 다만 살고 싶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 그 속에 들어가 피 흘리며 사랑하고 싸우며 다만 살고 싶습니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중에서
너에게 늘 말했듯이, 나는 네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줄 것을 믿고 있다. 직업이 아니다. 자리가 아니다. 어떤 형태, 어떤 영역이든 네가 선택한 그곳에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드높은 자리, 폭넓은 영향력을 가진 일을 하면서도 세상을 더럽히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딸아.
어느 세대나 밑의 세대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다. 이 끝없는 유전과 반복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세대는 모르겠다,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은 그렇다. 적어도 딸들이 ‘감동이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감동이 있는 삶. 무엇이어도 좋다. 거기에 치열하거라. 거기에 미치거라. 그래서 너만의 창과 방패를 만들거라. 네 그 빛나는 젊은 날에.
─<감동이 있는 나날을 살아라> 중에서
어머니는 한없는 사랑의 대명사, 그 상징이었다. 그리고 여인, 여성은 용서와 기다림, 인내와 희생 그리고 순종이라는 단어로 모자이크된 그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읽기 시작한 한국의 옛글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은 결코 그런 이미지를 가진 여자들이 아니었다.
『심청전』의 뺑덕어멈을 보자.
남의 집 호박만 보면 꼬챙이로 찔러대고, 코 큰 남자만 보면 쓸데없이 웃고, 쌀 퍼주고 떡 사먹는 이 여자, 우리들 모두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악성(惡性)이란 악성은 고루 다 갖춘 여인이 아닌가. 그러나 이 여인도 한국적 여성상의 하나다.
『흥부전』에서의 놀부 마누라는 어떤가.
흥부라는 별 볼일 없는 백수에 할 줄 아는 재주라고는 아이 낳는 것밖에 없는 이 시동생이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배가 고파서 부엌에 들어온 도련님의 뺨을 밥주걱으로 냅다 때리는가. 그 볼때기에 밥풀이 붙는 것도 싫어서 두 번째는 밥주걱을 닦아서 때린다. 피눈물도 없다.
『장화홍련전』. 어려서 그 책을 읽으며 이불 속에서 베갯머리를 적시며 훌쩍거려야 했던, 그 비극의 두 자매, 장화와 홍련. 그 『장화홍련전』의 계모는 얼마나 참혹한 여인이었던가. 쥐를 잡아 전처 소생 딸아이의 이불 속에 넣고, 처녀가 애를 낳았다고까지 모함을 한다. 장화와 홍련이도 그렇다. 귀신이 되어서까지 나타나 결국 원수를 갚는다.
『춘향전』이라고 다를 게 없다. 춘향이 엄마, 월매의 어디에 용서나 희생이나 순종 같은 단어가 끼여들 틈이 있는가.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나는 한국 여성의 원형 속에는 어디에도 용서, 기다림, 인내, 희생, 순종, 청결이라는 단어로 그려진 그런 여인은 없었다. 가련함, 약함, 수동적…… 어디에 그런 말이 합당한 여자가 있는가 묻고 싶었다.
한국 여성은 그런 허구에서 벗어나, 땀 흘리며 허벅지까지 올라가게 치마 걷어붙이고 일하고, 부엌에서도 침이 튀게 욕지거리 내뱉으며 씩씩거리며 살고 있는, 탐욕과 정염과 심보 가득 찬, 그래서 그윽한 영혼보다는 피 튀는 육체가 한결 우위에 있는 여성들이었다.
─<어디에 있는가, 한국의 여인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