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몸을 띄워 바다에 떴을 때, 내 몸은 두 개의 견고한 노를 가진 배처럼 느껴졌다. 연약하나마 내 몸은 용골 그 자체였다. 파도는 어렵지 않게, 어쩌면 이제야 속 시원히 푸른 고랑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용골을 만난 기쁨에 떠는 듯이 하얀 거품을 토해냈다.
섬이 없었다면, 나를 나 이상으로 끌어올려준 그 열렬한 동경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모래톱에 앉아 바다를 풍경으로 바라보는 소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헤엄을 쳐서 마침내 오리바위에 오른 나는 성취의 기쁨을 음미해 보기도 전에, 저 난바다 가운데서 또다시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듯한 십리바위를 보았다. 물론 한층 더 해심(??에 가까이 있는 그 십리바위에 이르려면 이제까지보다 더 험한 파도를 헤쳐나가야 할 것이었다.
― 16쪽, <1장 시린 기억들> 중에서
나는 단지 젊다는 것만으로 추위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무섭기는커녕 영하 40도쯤 수은주가 내려가보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눈이 펑펑 쏟아져 한 열흘쯤 눈 속에 갇혀 있었으면 싶기도 했다.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고, 부모의 슬하를 얼른 떠나고 싶은 조바심에, 겨울코트 맞춰입을 돈으로 집을 나와 용두동 개천가 무허가집에 사글세방을 빌렸다. 아궁이에서는 물이 나 불을 지필 수가 없었고, 벽지 대신 수성페인트를 칠한 벽엔 성에가 끼어 있었다. 코트값으로 방을 얻었기 때문에 물론 변변한 외투조차 없었다.
― 30~31쪽, <1장 시린 기억들> 중에서
‘나는…… 나밖에 모르는 남자에겐 관심이 없다. 사랑을 나눈 대상들이 열 명쯤, 또는 그보다 더 많아도 좋다. 그런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선택된 여자이고 싶다. 나의 사랑을 얻으려는 남자는 그런 모험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졌든, 수도승이든, 아편에 미쳤든, 노름에 미쳤든,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치르는 대가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내 동년배 청년들이 보여주는 관심이 내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사랑을 위해 무릅써야 할 위험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펼쳐져 있는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연인을 끌어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쉬운 것일 리가? …… 타넘을 담도 없고, 피해야 할 눈도 없고, 버려야 할 값진 것도 없고, 대적해야 할 적들도 없이, 어떻게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단지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 나이의 꽃다움을 스스로 저버렸고, 동년배 남자들의 눈부신 젊음을 하찮게 여겼다.
― 41~42쪽, <2장 한 남자를 사랑한 나> 중에서
“어디론가 훨훨 떠나고 싶어요.”
사실 그 말은 진심이기도 했다.
“그건, 내가 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과 믿음을 모독하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그 사랑을 지키는 것만이 최선의 진실이다.”
나는 이해했다. 손선생에 대해서 그분의 진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고, 나에 대한 그분의 진실은 사랑을 지키는 것이었다. 참으로 공평하고, 그 공평함이 그분에 대한 나의 믿음을 갈수록 깊게 했다.
그 믿음이 있어, 나는 긴 세월 동안 기다림의 고통, 만나자 곧 헤어지는 아픔을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손선생 역시 그랬을 것이다. 격렬하게 싸워도 손선생의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이해와 관용이었을 것이다.
― 79쪽, <2장 한 남자를 사랑한 나> 중에서
어느 날 나는 그녀의 동료인 영어선생으로부터 그녀에게 시험답안지를 갖다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교 앞에 있는 그녀의 자취방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푸르딩딩한 맨살의 허리통이 드러난 그녀의 펑퍼짐한 뒷모습! 그것은 나의 어머니―12년 연상의 남편을 맞아 평생 동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품고 살아온 나의 어머니―의 뒷모습이었으며, 곡마단 아주머니이기도 했고, 이유없이 소박을 맞고 사는 꽃처럼 젊디젊은 새언니이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 울음 한가운데서 섬약한 여성의 운명을 살 수밖에 없는 내 감정의 어떤 부분이 영원한 남성으로 전환하는 것 같았다. 그 남성은 그녀들을 사랑하되, 아픔과 상처를 절대로 주지 않고, 믿음직한 혈육이 되어 그녀들이 맞는 시련과 고통을 함께 짐지는 사람.
― 149쪽, <4장 나의 외딴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