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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로 중용을 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

『중용』의 핵심을 꿰뚫어 본질에 접근하는
학술 저널리스트 이한우의 탁월한 통찰과 명쾌한 풀이

저자
이한우 지음
출간일
2013년 02월 20일
면수
424쪽
크기
160*230
ISBN
9788965743699
가격
28,000 원
구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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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를 성찰하고 갈고닦는 데 진정한 길이 있다!

33장의 짧은 구성 속에 담긴 유교 경전의 진수
『중용』의 핵심을 꿰뚫어 본질에 접근하는
학술 저널리스트 이한우의 탁월한 통찰과 명쾌한 풀이


 
동양의 고전이자 조선의 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는 『논어』를 새롭게 읽고 풀이하여, 『논어로 논어를 풀다』라는 결과물을 독자들에게 내놓았던 학술 저널리스트 이한우가 이번에는 <이한우의 사서삼경> 시리즈의 두 번째로 『논어로 중용을 풀다』를 선보인다.
『중용』은 공자의 제자이자 손자인 자사(子思)가 공자의 말씀을 묶어, 그 해석을 덧붙인 책으로 총 33장의 짧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논어』『맹자』『대학』과 더불어 유학자들의 교과서인 사서(四書) 중 하나로, 본래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점차 경서의 지위를 얻으면서 송나라 주희가 장구를 나눠 풀이를 덧붙임으로써 사서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주희조차도 『중용』을 사서 중 가장 마지막에 읽을 것을 권했을 정도로 유학자들 사이에서 추상적이고 난해하여 독해도 쉽지 않은 경전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저자 이한우는 ‘논어로 논어를 풀다’[理論解論]의 연장선상에서 ‘논어로 중용을 푸’는[理論解中]는 새로운 독해와 이해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논어』를 먼저 읽어야 그 다음 『중용』이 이해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존의 『중용』 풀이가 한자어를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직역하거나 역사적 상황으로만 유추하여 그 해석을 시도했다면, 이 책은『논어』에서 제시된 공자 어록 속의 기본 개념들과 어휘를 바탕으로, 『중용』의 핵심 개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기존의 해석에 의심을 품고 거침없는 비판도 하면서 원전의 의미 즉 공자의 진의(眞意)를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용(中庸)’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명사로 해석해 ‘모자라거나 치우침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논어』에서 ‘문(文)’의 해석을 애씀, 애쓰다 등으로 해석함으로써 정확한 해석의 돌파구를 찾았듯이 ‘중용’도 ‘중하고[中], 용하다[庸]’ 즉, ‘핵심을 꿰뚫어 이해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노력한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이를 위해 『논어』의 여러 편들 사이사이에서 의미를 확실하게 해주는 단서를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찾아내어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리고 결국 『논어』에서 반복되던 주제, “각자 자신이 갖춰야 할 다움[德]을 애써[文] 배워서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몸에 익히는 것[時習]”, 즉 ‘學而時習(학이시습)’과 일맥상통하다는 점을 밝혀낸다.
저자는 정확한 한문의 이해와 해석을 돕기 위해 이 책에서 한자음 표기 방식을 바꾸어 한 단어처럼 해석해야 하는 경우는 붙여쓰기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음을 한 자 한 자 다는 방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논증을 위해『논어로 논어를 풀다』를 인용해야 할 경우에는 들여쓰기를 하여 미처 『논어로 논어를 풀다』를 읽지 못한 독자들도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는 한자와 고서(古書)에 대한 두려움으로 쉽사리 동양의 고전을 시도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간명한 풀이를 하고 있으며, 『논어』 속에 산재되어 있는 해석의 실마리들을 발견하고 재정리하여 자의적 해석이 아닌 논리적 해석으로 다른 『중용』 풀이와 차별점을 지닌다.

저자 및 역자

본문 중에서

왜 21세기에 우리는 『중용』이라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인간다움을 살펴보는 데 있어 『중용』만큼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책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논어』에도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한 수많은 제언과 지침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반면 『중용』은 수기, 『대학』은 치인에 집중하여 공자의 생각을 일목요연한 체계로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중용』을 통해 다시 한 번 수기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수기는 자기수양이고 함양(涵養)이며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을 닦은 다음에 남을 다스릴 것을 강조했다.
―「들어가는 말_ 왜 『중용』인가?」 중에서
 
 
중용(中庸)은 한 단어가 아니라 ‘중하고[中] 용하다[庸]’는 두 단어다. 여기서의 중은 가운데 운운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적중(的中), 관중(貫中)하다고 할 때의 그 ‘중’이다. 서경에 나오는 ‘문제의 핵심을 잡아 쥔다’고 할 때의 집중(執中)이 바로 ‘중하는 것[中]’이다.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사안의 본질이나 핵심에 닿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 것이 바로 ‘중하는 것(中)’이다. 
용(庸)도 떳떳함과는 상관이 없고 오래 지속하는 것이다. 즉 열과 성을 다하여 어렵사리 중하게 된 것을 온 힘을 다하여 유지하는 것이 바로 ‘용하는 것[庸]’이다.
―「프롤로그_ 왜 『논어』 다음에 『중용』인가?」 중에서
 
 
天命之謂性(천명 지 위 성) 率性之謂道(솔성 지 위 도) 修道之謂敎(수도 지 위 교)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중용』에서 처음 나오는 말이 천명(天命)이다. 천명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그런 의미의 명사 천명이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하늘[天]이 명하다 혹은 내려주다[命]’라는 동사적 의미에서의 천명이다. 따라서 ‘天命之謂性(천명 지 위 성)’이란 말은 하늘이 내려준 것을 일러[謂] 본성[性]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본성을 우리는 천품(天稟)이라고도 한다. 稟품은 바로 ‘주다’, ‘내려주다’는 뜻이다.
『중용』을 시작하는 첫 단어 천명은 아주 흥미롭게도 『논어』를 끝내는 맨 마지막 편인 ‘堯曰(요왈) 3’의 첫 번째 문장과 깊이 관련된다. 『논어』의 끝이 『중용』의 시작과 연결되는 것이다. 
―제1장 중에서
 
 
 
子曰(자왈) 中庸其至矣乎(중용 기 지 의호) 民鮮能久矣(민 선 능 구 의)
 
공자가 말했다. “중용은 (그에 이르기가) 아마도 지극(히 어렵다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용에) 오랫동안 능한 이가 드물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앞에서 우리는 중용(中庸)의 중(中)을 시중(時中)으로 풀었다. 그런데 그처럼 때에 맞춰 핵심을 적중하는 것은 지극한[至] 일이다. 지극하다는 것은 쉽게 이르기 힘들다. 즉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사람들이 (중하고 용하는 데) 제대로[能]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久]가 드물다고 말한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문제는 ‘民鮮能久矣(민 선 능 구 의)’의 번역이 두 가지 방향으로 엇갈린다는 점이다. 특히 久(구)에 대한 번역이 올바른 번역인지를 가르는 관건이 된다. 먼저 전통적인 번역을 보자.
“사람들이 능한 이가 적은 지 오래되었다.”(성백효 옮김)
“백성이 능함이 적은 지 오래이구나.”(김석진 옮김)
이 두 번역은 能(능)을 능한 이, 능함으로 옮긴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뜻은 비슷하다. 이런 번역은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한 주희의 풀이에 근거한 듯하다. 주희는 이 문장을 ‘그것(중용)을 능하게 하는 이(것)가 드물어진 지[鮮能之] 이제 이미 오래다[今已久矣]’라고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희의 풀이대로 하자면 옛날에는 드물지 않았는데 그 후 오랫동안 중용에 능한 이가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하고 용하는 것에 능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옛날과 지금을 대비시킨 주희의 풀이는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상당한 억지가 들어간 풀이이기 때문에 久에 대해서도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점에서는 김용옥이 정약용의 풀이를 받아들여 이 문장의 핵심 동사를 能(이) 아니라 久로 본 것은 정확한 이해다. 그래서 김용옥의 번역은 조금 다르다.
“아~ 사람들이 거의 그 지극한 중용의 덕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구나!”
다만 김용옥의 번역에는 能의 의미가 누락돼 있고 불필요한 감탄사 ‘아~’가 들어가 있으며 久를 ‘지속적 실천’으로까지 옮긴 것은 조금 지나친 느낌이다. 정약용의 풀이도 참고해야 하지만, 우리가 『중용』 풀이를 위해 채용한 방법, 즉 ‘논어로 중용을 풀다[以論解中]’에 따르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제3장 중에서
 
 
 
子曰(자왈) 道之不行也(도 지 불행 야) 我知之矣(아 지 지 의) 知者過之(지자 과 지) 愚者不及也(우자 불급 야) 道之不明也(도 지 불명 야) 我知之矣(아 지 지 의) 賢者過之(현자 과 지) 不肖者不及也(불초자 불급 야)
 
공자가 말했다.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알고 있으니, 지혜로운 자[知者]는 (도를)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알고 있으니, 현명한 자[賢者]는 (도를) 지나치고 현명하지 못한 자는 (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공자가 말한 두 대구(對句)를 핵심개념 중심으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앞 구는 道, 不行, 知者, 愚者, 過, 不及이고 뒷 구는 道, 不明, 賢者, 不肖者, 過, 不及이다. 그리고 지자(知者)도 행할 수 없고 현자(賢者)도 밝힐 수 없지만, 인자(仁者)는 행할 수도 있고 밝힐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씩 풀어가 보자.
먼저 공자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자신은 알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를 공자는 “지혜로운 자[知者]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愚者]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지자(知者)와 우자(愚者)가 정확히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를 풀이해야 하고 동시에 지나치다[過]와 못 미치다[不及]도 『논어』의 문맥에서 풀어내야 한다.
『논어』에서는 주로 인자(仁者)와 지자(知者)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대비되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보자. 먼저 ‘里仁이인 2’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인이나 예를 통해 자신을) 다잡는 데 (잠시 처해 있을 수는 있어도)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고, 좋은 것을 즐기는 데에도 (조금 지나면 극단으로 흘러)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다. 어진 자는 어짊을 편안하게 여기고[安仁] 지혜로운 자는 어짊을 이롭게 여긴다[利仁].”
 
공자나 유학의 텍스트에서 지자(知者 혹은 智者)는 인자(仁者)보다 한 수 아래다. 지자(知者)가 인을 이롭게 여긴다[利仁]는 것은 인이 어떠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스스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인을 편안하게 여긴다[安仁]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인을 체득하여 실행하는 경지이다.
―제4장 중에서
 
 
 
唯天下至聖(유 천하 지성) 爲能聰明睿知(위 능 총명예지) 足以有臨也(족이 유 임 야) 寬裕溫柔(관유온유) 足以有容也(족이 유 용 야) 發强剛毅(발강강의) 足以有執也(족이 유 집 야)
 
오직 천하제일의 성스러운 임금만이 능히 귀 밝고 눈 밝고 사리에 밝고 사람에 밝아 족히 ‘제대로 된 다스림’이 있게 되고, 능히 너그럽고 넉넉하고 온순하고 부드러워 족히 ‘제대로 된 포용력’이 있게 되고, 능히 뜻을 일으켜 외적으로 강하고 내적으로도 강하며 단호하여 족히 ‘제대로 된  국정장악’이 있게 되고, 능히 가지런하고 묵직하고 중화(中和)를 지키고 바름을 견지하여 족히 ‘공경함’이 있게 되고, 능히 문을 갖추고 사리를 꿰뚫어 보며 아주 치밀하고 샅샅이 살펴서 족히 ‘사리분별력’이 있게 된다. 
 
臨(임)에는 임하다, 직면하다 외에 다스리다, 통치하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런데 ‘임함’이라고 번역해 온 전통적 해석은 그 의미가 모호해서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책 첫머리에서 보았듯이 상당히 권위를 인정받는 전통적 번역 중 하나를 보면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능히 총명하고 예지함이 족히 임함이 있나니”로 돼 있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철학적 사고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학자의 번역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병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총명예지(聰明睿知)’의 경우 일반적으로 총명이나 예지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총명과 예지를 갖춤으로써’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좀 더 나눠서 총(聰) 명(明) 예(睿) 지(知)를 각각 번역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논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季氏 10’에는 군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명(明)과 총(聰) 외에 일곱 가지가 더 언급된다. 거기에는 바로 뒤에서 보게 될 온(溫), 경(敬) 등도 포함돼 있다. 그 또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군자 또는 덕을 갖춘 군주가 마땅히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이 대부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아홉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볼 때는 밝음을 먼저 생각하고, 들을 때는 귀 밝음을 먼저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함을 먼저 생각하며, 몸가짐을 할 때는 공손함을 먼저 생각하며, 말할 때는 진실함을 먼저 생각하며, 섬길 때는 공경함을 먼저 생각하며, 의심스러울 때는 물음을 먼저 생각하며, 분할 때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며, 얻음(이익)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는 군자라면 어떤 행동거지를 할 때 반드시 우선적으로 염두에 둬야 할 아홉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군자의 바람직한 외모와 내면에 관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지인(知人)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것은 군자와 군자답지 못한 사람[小人]을 판별해 내는 단서이기도 하다. 
―제31장 중에서

추천사

목차

들어가는 말_ 왜 『중용』인가?

프롤로그_왜 『논어』 다음에 『중용』인가?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제10장
제11장
제12장
제13장
제14장
제15장
제16장
제17장
제18장
제19장
제20장
제21장
제22장
제23장
제24장
제25장
제26장
제27장
제28장
제29장
제30장
제31장
제32장
제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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