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과학공학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의 분쟁과 갈등은 종전보다 더 심각해지고 있으며,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고, 세계 곳곳에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여전히 식량난이 심해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도시개발과 도로확충 및 산업시설의 첨단화로 인해서 생태계가 극심하게 파괴되고 있다. 1960년대 마르쿠제가 말했던 ‘일차원적 인간’과 ‘일차원적 사회’의 모습이 21세기 우리들의 눈앞에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전개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였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새삼스럽다. 철학적 사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탐구정신이다. 주체적인 나에 대한 탐구정신이 바로 철학적 사유이다.
―강영계,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였다」 중에서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물음 중의 하나는 사유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유는 우리가 세계의 존재를 경험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를 시작으로 플라톤,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유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해왔다. 특히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주장 그리고 칸트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는 철학의 논의에서 사유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쇼펜하우어도 이처럼 서양철학의 흐름에서 사유와 존재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판에서 칸트와 버클리가 사유와 존재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경험적 해석’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서규, 「쇼펜하우어, 사유의 기원」 중에서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코와 눈이 추한 이유는 그렇다고 생각한 나의 태도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눈과 코를, 나의 것으로 흔쾌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긍정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나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긍정은 변증법적 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눈과 코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그것을 재료로 삼아서 나의 몸을 작품으로 완성해야 하는 예술가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것은 나의 얼굴이나 키, 몸매는 물론이고 삶의 방식, 직업, 취향 등과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자기에게 고유한 하나의 개성적인 스타일로 만들라고 주문하였다.
―김종갑, 「니체, 몸과 현대인」 중에서
들뢰즈는 자신이 말한 철학적 정의를 몸소 실천하기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개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또 다른 의미로 변화시켰다. 그래서 들뢰즈의 개념들은 마치 조각난 퍼즐처럼 언제나 또 다른 의미로, 또 다른 해석으로 끊임없이 변신한다. 결국 이러한 철학적 특징은 바로 그의 철학을 복잡하고 난해하게 만드는 원인이었고, 독자로 하여금 그를 매우 불친절한 저자로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결코 들뢰즈의 책을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기엔 그의 외침은 여전히 생생하게 우리에게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이성이란 자신의 거대한 사유의 물결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개념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사유는 아니 정확하게 표현해서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는 헤겔적인 정신의 소유 능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의 사유처럼 명석판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가치와 가능성을 늘 새롭게 바라보고 긍정하는 생성적이고 창조적인 사유의 운동이자, 철학적 사유에 반드시 요구되는 존재론적인 지평이다.
―최진아, 「들뢰즈,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 중에서
다산은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한계를 직접 목도하고 강진 유배지에서 확인한(특히 『다산시문집』 4권, 5권) 절대 다수의 기층민의 핍절한 생활사를 경험하면서, 지배이념의 붕괴와 양반 관료체제의 부패, 세도정치의 횡행으로 조선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끝내 망할 것(必亡乃已)”이라고 단언했다. 그만큼 다산이 느꼈던 시대적 분위기는 엄중하고 처연했다. 다산 사후 70년이 지나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을 때 고종이 다산의 필사본을 통독하면서 “어찌 지금 나에게는 이런 신하가 없느냐!”고 탄식을 했지만 다산의 유작을 비롯한 『논어고금주』는 당시에는 금서에 가까웠다.
브로델의 지적대로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되고 지금까지 ‘장기 지속’된 텍스트 중에 『논어』만한 텍스트가 또 있을까? 이 질문을 변형시켜 다시 물음을 던져본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장기지속’된 동아시아 경학사에서 『논어고금주』만큼 정밀하고 독창적인 분석이 몇 번이나 시도될 수 있었을까?
―김병철, 「다산에게서 ‘배움’, ‘익힘’ 그리고 ‘즐거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