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출생(出生)을 스스로 좌우할 수 없는 게 인간이지만, 여행은 그런 인간이 완전히 다른 시간과 공간을 직접 선택해 자신을 거듭 낳는 ‘출산(出産)’이다. 자신을 스스로 새롭게 출산하는 행위가 바로 여행인 것이다.
아네크 라인이 에게 해를 가로지르는 동안, 나는 꼼짝 않고 내내 잠을 자리라. 출렁거리던 배가 마침내 부두에 닻과 로프로 자신을 단단히 고정하면, 새벽까치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뱃전을 박차며 뭍으로 뛰어오르리라. 하룻밤의 항해가 데려다 준 낯선 시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롭게 출산할 것이다. 여행은, 삶과 현실이 안팎으로 만나고 접히며 이어지는 ‘거대한 책’을 넘기는 행위인 듯싶다.
「자유로운 영혼을 찾아 크레타 섬으로」 중에서
『신곡』은 단테의 개인사가 고스란히 담긴 자전적인 작품이지만, 삶의 구원(救援)이라는 인류의 희망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때 ‘구원’은 흔히 말하는 신앙적 의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 세계에서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적극적 의미까지 포함한다. 또 베르길리우스가 이성(理性)을 상징한다면, 베아트리체는 ‘신앙’과 ‘사랑’을 상징한다. (……) 구원이라는 주제는 『신곡』이 중세적 가치관에 충실함을 뜻한다. 한편,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덕분에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신곡』의 설정은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근대적 가치관을 말한다. 이렇듯 『신곡』은 중세를 마무리하면서 근대를 연 작품이다.
「꽃의 도시 피렌체, 성스러운 희극의 발자취」 중에서
『돈 키호테』에는 ‘작가를 낳는 작가’ 세르반테스의 생생한 육성(肉聲)이 담겨 있다. 강력한 종교 재판과 왕권이 존재했던 에스파냐에서는 작가가 자유롭게 글을 쓰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세르반테스는 기상천외한 페이크 기법을 창안하여 악조건을 유유히 풀어 나갔다. (……) ‘현실에 가깝기는 해도 소설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시각을 전제로 한 『돈 키호테』는 이야기 전달에 급급했던 기존 소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돈 키호테』를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말하는가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이 사실은 하나라는 사실, 다시 말해 문체와 주제가 하나로 녹아있음을 자기도 모르게 깨닫게 된다.
「에스파냐의 정신,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중에서
사람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단(西端)에 위치한 피니스테레를 ‘땅끝’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곳은 바다(대서양)의 시작이다. 또한 바다 쪽에서 보면 땅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처럼 동일한 사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문제는 다 알면서도 거의 매번 그러한 진실을 놓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자신의 육체적 눈을 과신한 나머지 내면의 눈을 잊곤 한다. 옛이야기의 예언자들이 대부분 ‘장님’인 것도 이러한 인간 존재의 한계를 암시한다. 육체의 눈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영혼의 눈으로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과연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갑자기 ‘의미’란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길이라는 실체보다 오히려 길이라는 표현, 그 은유와 상징 속에서 나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진짜 의미를 놓친 것은 아닐까.
「땅끝 마을 피니스테레에서 찾은 희망의 노래」 중에서
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지리적으로만 이집트의 것일 뿐, 정신적으로는 지구촌 전체의 지식 문화유산이다. (……) 그런 의미에서 고대 알렉산드리아에는 두 개의 등대가 있었다. 하나는 자연의 어둠을 밝히는 파로스 등대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는 등대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좌우에 파로스 등대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가볍게 보아 넘기지 못할 절묘한 안배다.
등대는 사라졌으나 도서관은 1,600여 년 만에 인류를 하나로 묶으며 새롭게 태어났다. 동서 문명을 융합하여 르네상스의 초석을 다졌던 고대 도서관처럼, 새 도서관은 세계 공존공영을 꿈꾸는 학문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진정한 도서관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한 책’으로, ‘우주의 자궁’으로 또렷하게 존재한다.
「21세기의 보고로 거듭난 이집트의 고대 도서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