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전은 오늘날에도 모든 건축 중 으뜸으로 칭송되며 최근에는 유럽 문화 자체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B.C. 600년경, 그리스인들이 목재와 점토 대신 돌로 신전을 짓기 시작했던 시대에 그 기원이 있다. 최초의 건축 이후 150년 뒤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지면서 그리스 신전은 고전적 모습을 확립했다. 18세기 후반에 파르테논 신전을 재발견한 후 학문적 결과들이 속속 출판되면서 그리스 건축은 그때까지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로마의 모범들을 몰아냈다. 이런 과정에서 영국의 ‘그리스 리바이벌’과 대륙의 의고주의가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테논은 오랫동안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사실 이 신전의 진정한 비밀은 가장 큰 요소에서 작은 요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간단한 수학 공식으로 바꿀 수 있는 비례 관계가 아니다. 수평적 건축 요소와 수직적 건축 요소들이 살짝 엇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센티미터 차원의 완만한 곡선이 진정한 비밀이라 할 수 있다.
― <파르테논 신전> 중에서
브루넬레스키는 전에 없던 것을 시도하였다. 지붕을 건축하면서, 자체적으로 무게를 지탱하는 둥근지붕을 지으려 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을 원으로 사각형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브루넬레스키가 관찰과 단순한 계산을 통해 도달한 둥근지붕의 건축 기술은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것이었다. 아치가 모범을 제시해 주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아치의 원칙을 수직의 요소에서 수평의 요소로 받아들였다. 보통 아치를 만들 때 쐐기 모양의 돌을 깎아서 쌓는다. 아치의 아귀가 맞으면 아치는 홀로 서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비계가 필요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둥근지붕을 수평 층으로 쌓아올리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돌들은─아랫부분은 사암, 위쪽에는 가벼운 벽돌과 응회암─층이 올라갈 때마다 미세하게 안으로 기울면서 서로를 지탱해 주었다. 각 층의 기울기가 매우 적기 때문에 비계가 필요 없었다. 한 층이 완전히 둥글게 마무리되면 그것은 완벽하게 안정감을 얻으면서 스스로를 지탱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모형에서 진짜 둥근천장으로 정확하게 이행하는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어떤 측량 제어술을 썼을까? 광학 기구를 썼던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다.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지붕은 두 겹으로 만들어졌다. 건축의 실용성 면에서만 보자면 그것은 엄청난 자재 절감과 무게를 줄이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가 밖에서 보이는 더 큰 지붕과 내부 공간을 짓누르지 않는 더 안쪽의 작은 둥근지붕을 만들려 했으며, 그로써 건축 역사에서 처음으로 관찰자의 시점을 고려했다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회화에서도 마사초가 겨우 몇백 미터 떨어진 새 성모 교회에서 삼위일체 벽화로 역시 관찰자의 시점을 고려하였다. 인간은 단번에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개인’이라는 이념이 태어났다. 그와 더불어 르네상스도 태어났다.
―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지붕> 중에서
1546년에 상갈로가 죽고 미켈란젤로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그는 40년 전에 이 계획에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상갈로의 중요한 동조자들을 해임하고 건축 현장도 대규모로 정리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쓴 바에 따르면 현장은 “비즈니스이자 돈벌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작업이 끝나지 않도록 질질 끌려는 경향이 있었다.”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온갖 관계자들도이 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구상들이 나왔다. 수십 년 동안 그것은 철거되고 새로 지어지고 다시 철거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구상이나 건설 현장 양쪽에서 지속성을 얻었다. 이렇게 잦은 변화의 원인은 개성과 정치 둘 다에 있었다. 파울루스 3세와 미켈란젤로는 서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교회의 개혁에, 다른 사람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을 세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두 가지는 서로 굳게 결합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1560년대 초에 트리엔트 공의회로부터 새로운 자신감을 얻고 강력해진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많은 수의 신자들이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로 넘어갔지만 그래도 가톨릭 교회는 승리하였다. 이런 승리와 새 시작의 상징이 로마의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중에서
화이트 타워는 오래 전에 파괴된 루앙 공작의 궁전 거주탑을 본따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윌리엄은 자신이 노르망디 공작 가문 출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집안의 서자였다. 이로써 새로운 시대는 윌리엄과 그의 집안을 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이 성의 겉모습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실제적인 방어력이 건축의 수단들을 통해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화이트 타워는 돌로 된 괴물이 아니라 섬세하게 분절된 건축물로서 주변 지형을 이용해 우뚝 솟은 건물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다가 수 미터 두께의 성벽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받침기둥들이 정면부를 수직 방향에서 규칙적으로 분할한다. 이들 받침기둥들은 위로 솟은 탑들, 그리고 성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옮긴이)와 함께 거대함과 권력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성채이며 방어용 건물로 지어지기는 했지만 화이트 타워는 포위당한 적이 거의 없으며 정복된 적도 없다. 이 건물은 처음부터 상징적인 건물이었고, 오늘날에도 영국의 국가상징이다.
―<화이트 타워> 중에서
루이의 침실은 궁성에서 기하학적·이상적인 중심점을 이룬다. 궁정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왕의 기상과 취침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프랑스의 가장 높은 귀족들이 이 행사에 참가하였다. 왕의 침실로부터 동쪽으로는 세 도시, 곧 생클루, 파리, 소 등의 도시 이름들이 붙여진 가로수 길 셋이 뻗어나가고, 서쪽으로는 운하가 뻗어나간다. 태양신 아폴론은 사두 마차를 타고서 ‘태양왕’ 루이 14세를 비추기 위하여 떠오른다. 거울의 방 통로는 이 ‘태양의 축’ 방향을 가로지른다. 거울의 방 통로의 양쪽 끝에 있는 평화의 방과 전쟁의 방은 왕의 실질적인 권한과 정치적 성과를 상징한다.
1703년에 건설된 유럽의 북동쪽 끝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베르사유는 18세기 궁성·도시 건설의 모범이 되었다. 단 영국만 예외였다. 영국은 루이의 궁정을 부분적으로만 참고하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영국에서는 그곳의 베르사유라 할 수 있는 ‘반(反)베르사유’가 건설되었다. 도이치 나라들의 사정은 다르다. 열 명 이상의 영주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궁성으로 다른 영주의 궁성과 경쟁하려 하였다.
르 보가 보 르 비콩트에서 보여준 별장 형식은 도이치 지역에서 절정기를 맞았다. 이 별장 형태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성인 상수시의 모범이 된다. 대왕은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모토인 “짐이 곧 국가다”에 맞서, “짐은 국가 제1의 하인이다”라는 계몽주의 모토를 내걸었다.
― <베르사유 궁성> 중에서
에펠 탑은 1889년 세계박람회에서 관객의 인기를 가장 많이 끌었다. 정확하게 2백만 명이 관람하였다. 그것은 박람회에 사람을 끌어들인 품목이면서 동시에 기념비였다. 1789년의 혁명, 기술과 진보의 혁명이었다. 탑이 모습을 드러내자 비난은 잦아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철 골조, 이렇게 높은 건축물이 일찍이 세워진 적은 없었다. 에펠은 이 탑으로 수직선을 정복하였다. 윌리엄 르 배런 제니가 시카고에 세운 홈 보험 빌딩은 55미터 높이였고,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66미터 높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132.5미터 높이였다. 탑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비례와 크기의 상황이 아득해졌다. 에펠 탑은 시대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그것은 기둥받침대, 기둥몸통, 기둥머리 등 기둥의 모범을 따랐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기둥에 구현된 고대의 표상은 이제 타당성을 잃었다.
― <에펠 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