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세종에게 국왕 수업을 시키면서 “화포는 군국(軍國)의 중대사”임을 역설했다. 태종이 대마도 정벌에 나서고 세종이 김종서를 통해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도 두 임금이 개인적으로 용맹했다기보다는 성능이 뛰어난 화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 27년(1445년) 7월 18일, 2,400명 규모의 최정예 포병 부대인 총통위(銃筒衛)가 설치된다. 마침내 우리 역사 최초로 포병 부대가 탄생한 것이다. 3년 후인 세종 30년 1월 28일, 총통위의 규모를 4,000명으로 확대했다. 세종 때나 문종 때는 총통위가 핵심 부대로 취급 받아 국왕 경호는 물론이고 북방 전투에도 투입될 정도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총통위가 통제하기 힘들 만큼 막강해지자 두려움을 느껴 총통위를 혁파해 버렸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안보를 위해 내린 오판(誤判)이었다. 이후 조선의 국방력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화포의 성능도 나아지지 않았다.
―2장 살아남으려면 권력을 거머쥐라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안보가 우선이다> 중에서
율곡 이이라고 해서 200년 가까운 악습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하고 거만하기까지 했던 스물아홉의 청년 이이는 승문원에 발령이 났다. 승문원 선배들이 허참례를 요구하자 이이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물론 선배들은 발끈했다.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는데 혼자서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이를 좋게 볼 리 없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이이는 선배들의 미움을 받아야 했다. 그때의 수모를 잊지 못한 이이는 훗날 선조에게 다시 한 번 이 악습의 폐지를 건의했다.
“대개 호걸의 선비는 (바로 이 허참례 때문에) 오히려 과거를 볼 생각조차 않고 있습니다. 관을 망가트리고 의복을 찢으며 진흙탕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위엄과 체통을 모두 손상당하고 염치를 버린 다음에야 근무할 수 있도록 한다면, 호걸의 선비로서 누가 세상에 쓰이기를 즐거워하겠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겨난 악폐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다가 조선이 망하면서 함께 사라지게 된다. 허참례 때문에 겪은 조선 백성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국망(國亡)의 원인 중 하나인 관리의 부패가 실은 허참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참례를 위해 신참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돈을 동원해야 했고, 결국 그것을 갚으려면 부정한 행위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4장 뜻이 좋아도 법도가 있다 <신고식 하느라 집까지 팔았다더라> 중에서
경복궁의 설계자는 누구일까? 서울의 궁궐들을 돌아보면 아름답기로야 창덕궁이 최고지만 역시 정궁(正宮)으로서의 위엄은 경복궁이 으뜸이다. 다른 궁궐은 경복궁의 건축 미학을 약간씩 변용한 것에 불과하다.
토막 상식 하나, 경복궁을 만든 사람은? ‘태조 이성계’라고 하면 너무나 무성의한 답이다. “예술의전당을 만든 사람은?”이라고 물었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라고 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질문을 바꿔본다. “예술의전당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김석철이다. 그렇다면 경복궁을 설계한 이는?” 이럴 경우 상식이 풍부한 한국인이라도 십중팔구 ‘정도전’이라고 답한다. 유감스럽게도 틀린 답이다. 정답은 김사행이다.
경복궁과 관련해 정도전이 한 일은 태조 4년(1395년) 12월에 경복궁이 완성된 후 전각(殿閣)의 이름을 지은 것뿐이다.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등의 이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경복궁을 지은 천재 건축가 김사행의 이름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작명자 정도전이 차지했다.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게 바로 역사 왜곡이다. 왜곡의 ‘왜(歪)’ 자를 살펴보라. 올바른 것[正]을 아니다[不], 혹은 잘못된 것[不]을 바르다[正]고 하는 것이다. 이런 왜곡이 일어난 이유는 그가 환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후일의 태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당했기 때문에 오욕의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5장 역사는 실력 있는 자를 기억한다 <경복궁은 환관이 설계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