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 김씨의 종형(從兄), 즉 사촌오빠인 김석주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명성왕후는 수렴청정 포기라는 결단을 못 내렸을지 모른다. 김육의 후손답게 서인이면서도 ‘친(親) 남인 반(反) 송시열’성향을 갖고 있던 김석주는 특히 서인과의 일전불사 및 남인으로의 정권교체를 추진했던 현종 말년에 주목을 끌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현종이 급사했을 때 현종의 그 같은 유지(遺志)를 고스란히 이어서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였다. 게다가 숙종과 혈육지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흔들리는 집권 초반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어리고 미숙한 숙종을 권력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1등공신이 다름 아닌 김석주였다.
― <2장 폭풍전야와도 같았던 집권 초기> 중에서
숙종 1년 10월 8일 승정원에서는 경연청 공사로 인해 당분간 경연을 중단하는 게 좋다는 청을 올렸다. 그에 대한 15세 숙종의 답변이다.
“하루 경연을 쉬면 학문 공부가 중단된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고 하였다. 내가 밤낮으로 생각하며 이를 마음에 새겼기 때문에, 밤중에 비로소 잠을 자고, 닭이 처음 울면 곧 책을 펴고 성현(聖賢)을 대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니, 혹시 옛사람의 일컬은 바, ‘오늘 배우지 아니하여도 내일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는 경계에 어긋남이 있을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역사(役事)를 마칠 동안 단지 주강(晝講)만 여차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
― <3장 청년 숙종의 정신세계> 중에서
숙종 6년(1680년) 1월 9일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숙종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새해가 된 뒤에 비로소 여러 신하가 접견하였으므로 나는 마땅히 여러 신하를 위하여 경계하여 타이르니, 여러 신하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 작년의 일을 보면 조정이 궤열(潰裂)되고 화기가 손상되었으니, 대소 신하들은 나의 말을 정신차려 들어서 붕당이라는 두 글자를 제거하고 이조에서도 이 뜻을 알아서 사람쓰기를 공평하게 하라.”
얼핏 보면 의례적인 말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작년, 즉 숙종 5년의 정치를 이끌었던 인물은 영의정 허적이었다. 그 허적이 바로 앞에 있는 데서 붕당의 문제를 직접 경고한 것이다. 허적 정권에 대한 숙종의 부정적 생각이 처음으로 표출되는 순간이다. 당시 이조판서는 이원정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일상적인 정무처리 과정에서 영의정 허적에 대해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이때부터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몇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인정권은 자제할 줄을 몰랐고 흉흉한 소문마저 귀에 들어왔다. 숙종은 3월 28일 전지를 내려 공조판서 유혁연, 광성부원군 김만기, 포도대장 신여철을 빈청에 모이도록 명했다.
― <6장 대혼돈의 물결> 중에서
숙종은 적어도 국정에 관한 한 철저하고 부지런했으며 유능했다. 그의 성격상 무능한 사람은 두고 보질 못했다. 남인은 워낙 세력이 소수였기 때문에 국가운영 능력에 필요한 인재풀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인은 숙종의 이 같은 경고를 의례적인 것으로 들었을 뿐 남인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지 못했다. 남인의 집권이 영속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숙종은 검약했고 늘 국가자원을 절약하고 백성들이 세금을 줄여주는 데 깊은 관심이 있었다. 이런 태도는 당쟁과는 무관하게 일관성을 보였다. 이런 주제로 관리들에게 책문(策問)을 요구하는 일도 잦았다. 이 또한 숙종이 어떤 당파의 국정운영 능력과 태도를 재는 중요한 잣대였다.
― <9장 조선 역사상 왕권이 가장 강력했던 시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