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를 빼면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가 1883년 기계에 대해 저술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물레로부터 방직 공장에 이르기까지, 선반으로부터 압연기에 이르기까지, 손수레부터 기차까지, 모든 것이 사라진다.”
바퀴가 언제 어디서 발명되었는지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은 막연하게 그리고 간접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단 수송에 대한 필요가 바퀴를 발명하는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로 하자.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옮겨가면서 보다 큰 물건들을 수송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천막, 오두막으로 시작해 집과 사원을 지을 자재를 운반해 와야만 했고, 창고도 지어야 했다. 이 과도기에 바퀴의 시대가 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 <썰매와 바퀴> 중에서
14세기 후반에 동을 녹여 총과 대포를 만들기 시작했다. 종을 만들던 사람들의 노하우가 대포 제조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원거리 무기들이 활과 화살을 몰아내면서 유럽의 전쟁 기술이 급속하게 변했다.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에도 총기류와 배의 대포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화약의 도움으로 유럽은 적어도 한동안은 전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전쟁을 위한 화약의 사용이 증가하면서 질산칼륨의 확보가 문제가 되었다. 질산칼륨의 자연 생산지는 인도와 스페인이었는데, 수송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모두가 간절히 원하던 이 욕망의 원자재는 사실 거름과 두엄에서도 얻을 수 있었다. 프로이센과 프랑스에서는 거름을 모아두는 것이 농부들의 의무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심지어 정기적으로 소변을 보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 <화약과 총> 중에서
로저 베이컨은 언젠가 “동물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달리는 마차가 만들어지기를” 꿈꾸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철도의 발명을 “인류에게 새로운 변혁을 가져다준 사건, 삶의 색깔과 모습을 바꾼 사건”이라고 묘사했다. “모든 나라의 산과 숲이 파리로 향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기에서 독일 보리수 나뭇잎의 향을 맡고 있고, 내 문 앞에서는 북해가 넘실댄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다섯 권으로 발행된 『영국사』에서 토머스 맥컬리는 철도의 혁신적인 힘을 문자 및 인쇄의 발명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거리를 단축시킨 발명들이 알파벳 그리고 인쇄술과 함께 인류의 문명에 가장 많이 기여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비행기, 고속도로, 인터넷, 고속 통신망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철도> 중에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본래 농아 교사였고, 전기 기술 영역에서는 재능 있는 아마추어이자 독학자였다. 그 역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말을 글자로 바꾸고자 했다. 주파수 내에서 잘게 부서지는 음향 신호를 동시에 전신으로 보내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보를 받아 적는 서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이 가능하다면 전기 신호를 전신선의 끝에서 다시 음향 신호로 바꿀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1876년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에서 벨의 전화기가 선보였고, 1년 후 이 발명가는 자신의 특허를 상품화하기 위해 벨 전화기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는 훗날 세계적인 전화 회사인 AT&T로 성장했으며, 끝내는 그레이의 모회사인 웨스턴 일렉트릭까지도 삼켜버린다.
―<전화> 중에서
중세에는 사람들이 새의 날개를 흉내낸 옷을 만들어 입거나 널찍한 외투를 걸치고 탑에서 떨어져 죽는 사례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비행에 대한 환상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서 시작하여 케플러와 프랜시스 베이컨을 지나 라이프니츠와 루소에 이르는 비행 프로젝트 입안자들의 긴 리스트가 증명해 주고 있다.
최초의 대서양 횡단에는 2만 5천 달러의 상금이 걸렸는데, 찰스 린드버그라는 키가 크고 굼뜬 젊은 우편항공기 조종사가 220마력의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를 타고 뉴욕과 파리 사이의 6천 킬로미터 구간을 33시간 32분 만에 횡단했다. 날씨와 피곤과의 고독한 싸움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비행한 다른 이들은 거의가 실패했는데, 많은 대양 횡단 조종사들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비행기> 중에서
니프코 원판 대신 브라운관이 화면을 읽는 최초의 완전 전자식 텔레비전 영상은 물리학자 만프레드 폰 아르데네가 1930년 12월에 최초로 세상에 내놓았다. 1936년 올림픽에서 텔레비전은 처음으로 그 위용을 드러냈다. 베를린에서만 20개의 ‘텔레비전 방’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올림픽 경기를 중계했고, 그중 하나는 독일제국 체신부에서 직접 이 새로운 매체를 홍보하기 위해 마련했다.
2차 세계대전은 5년 동안의 영상 장애를 초래했다. 연구와 발전은 정지되거나 오로지 군사적 이용에만 집중되었다. 텔레비전은 20세기 후반세기 동안 세계적인 매체가 되었다. 텔레비전은 선도 매체로서 영화를 앞질렀고, 이제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디지털 데이터 물결이 기술을 지배하고, 컴퓨터라는 매체가 대중문화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로칭이 꿈꾸었던 ‘전기 눈’은 마우스 클릭 한 번에 가족 영화관, 오락실 그리고 글로벌 인터넷과 융화된 멀티미디어가 연결되는 컴퓨터 안에서 실현되었다.
― <텔레비전/멀리tele-보기vision> 중에서
이때는 세계가 2차 세계대전에 막 돌입한 상태였고, 새로운 공포의 무기, 원자폭탄이 만들어지려는 찰나였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레오 실라드는 특히 폭탄 제조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이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미국의 손에 원자폭탄을 쥐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서 자신과 자신의 친구 유진 위그너가 쓴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설득했다. 편지에는 원자폭탄이 히틀러에 손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 편지가 역사를 만들었다. 독일이 만들지도 모르는 폭탄에 대한 루스벨트의 불안이 증폭되었고, 그 결과 미국은 1942년 9월, 전례 없이 규모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맨해튼 계획을 수립했다.
1945년 7월 16일,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학자들은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탄, 즉 시험 원자탄 ‘트리니티’에 불을 붙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3주 후 미국의 원자폭탄 한 개가 일본의 히로시마 위에 떨어졌다. 그로부터 다시 사흘 후 나가사키가 세 번째 핵무기의 제물이 되었고, 핵무기는 결국 세상을 변하게 한 대사건이 되었다.
― <원자력> 중에서
마우스 클릭을 통해 세계 어딘가 먼 곳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문서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네트워크에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그것에 걸맞은 프로그램 구조와 간단한 사용법으로 이용 가능한 것이 월드와이드웹(www)이다. 월드와이드웹은 1991년 유럽 대형 연구소 CERN의 연구원 팀 버너스 리가 개발했다. 이 구조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컴퓨터들이 네트워크에 연결됐다.
아직은 가정의 PC가 네트워크에서 흘러나오는 ‘주스’를 먹기 위한 ‘콘센트’이지만, 곧 핸드폰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미래에는 옷에 달고 다니거나 심지어는 피부에 극도로 얇게 심게 될 미니 PC 가 영구적으로 연결되어 세계적인 정보 가판대와 오락실이 될 것이고, 이메일을 발송하고 받고, 신체 접촉만으로 전자 명함이나 기타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먼 미래에는 뇌 속에 칩을 장착해서 순전히 생각만으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 <인터넷>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