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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저자
이한우 지음
출간일
2006년 09월 18일
면수
392쪽
크기
223*152
ISBN
9788973377732
가격
18,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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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모든 것을 누렸으나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은’ 국가경영자
‘성종의 태평성대는 어떻게 조선의 미래를 좌우하는가!’


역사교과서는 성종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
‘선비의 나라’가 만들어낸 조선 최고의 행운아
풍요로운 조선을 유산으로 받아, 쇠퇴의 기운을 물려주다!
서열 3위에서 한명회의 사위가 되어 오른 왕위,
세종과 세조에게 물려받은 국가역량으로 구가한 태평성대.
국력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군주가 자초한 역사의 그림자를 파헤친다.

조선왕조의 7대 왕을 선정하여 저널리스트적인 예리한 시선과 돋보이는 감각적 필치로 그들의 빛나는 치적을 ‘리더십’ 측면에서 본격 분석하는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가 『태종』 『세종』에 이어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를 세 번째 책으로 출간했다.
저자는 전작의 두 왕들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입장에서 조선의 9대왕 ‘성종’에게 접근하고 있다. 『경국대전』을 완성했고, 활발한 친경(親耕) 활동으로 농사에 모범을 보였으며, 독서당 등을 설치하여 문운을 진작시켰을 뿐 아니라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오례의』, 『악학궤범』 등의 간행을 주도한 뛰어난 왕이자 위대한 성군이었다는 게 그에 대한 일반적인 후대의 인식이다.
저자는 600년을 이어온 이러한 평가에 팽팽하게 맞서 반론을 제기한다. 성종의 재위 시기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였음은 부인하지 않지만 그 태평성대는 명백한 성종의 작품이 아니라, 세종에서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선대가 이룩한 업적의 최고 절정을 단지 ‘누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종의 집권을 거친 뒤부터 조선은 쇠퇴의 일로를 걷는다. 훈구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신진 세력 도입을 시도해 보지만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조선 최초의 폐비 사건이 비극적인 연산의 운명을 만들었으며, 중종 이후 펼쳐지는 사림의 득세는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결국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실록』이라는 명확하고 객관적인 토대 위에서 이 반론의 모든 근거를 꼼꼼하고 명백하게 제시하며 성종의 치적을 뒤쫓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과 새로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한명회를 비롯한 외부 세력의 시나리오에 의한 재위 과정은 그의 왕권 강화를 어렵게 했고, 7년이라는 긴 기간의 수렴청정과정을 거쳐 친정 체제에 돌입했지만 결국 정희대비, 인수대비, 인혜대비의 3전과 한명회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학문에서는 확실한 성리학 애호가였기에 그에 따른 문운의 발전이 있었지만 성리학의 특성인 명분이라는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을 뿐 아니라, 국리민복(國利民福)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필수 불가결한 현실적 과제는 외면한 채였다. 또한 인간적이고도 남성적인 무신의 기질은 돋보이는 점도 있었으나 결국 이에 연유해 사냥과 활쏘기, 주색잡기의 탐닉에 이른다. 북정(北征) 역시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던 한편, 사림의 진출을 꾀함으로써 훈구를 견제하며 왕권의 안정을 누렸다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성종의 새 세력은 중․하위직의 소수에 그쳤을 뿐, 국정의 중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종은 어떻게 성군으로 치장된 것일까? 그 이유를 저자는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였다는 데서 찾는다. 현실적 실리보다 명분을, 일하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을 중시한 조선은 문약한 ‘선비의 나라’였고, 성리학자들이 붓을 잡고 기록한 역사는 당연히 성종에게 후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문약의 전통은 한국인에게 여전히 선비에 대한 환상과 더불어 성종에 대한 환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의 정치를 실현해줄 리더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지금, 성종의 치적을 뒤쫓으며 과대 포장된 옛 평가의 정당성을 날카롭게 되묻는 이 과정은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의 해답을 찾는 역사 탐구의 진정한 가치가 발휘되는 순간이자 지금의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 과정이 되리라.

저자 및 역자

이한우

이한우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와 《문화일보》를 거쳐 1994년 《조선일보》로 옮겼다. 2002~2003년 논설위원을 지낸 후 문화부 기자로 학술과 출판 관련 기사를 썼으며 문화부 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논어등반학교 교장으로 1년 과정의 논어 읽기 강좌를 비롯한 다양한 원전 강독 강의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군자 리더십을 설파하고 있다. 10여 년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탐독하며 조선 군주의 리더십 연구에 몰두해 온 저자는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 즉『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숙종: 조선의 지존으로 서다』,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를 펴냈고, 조선의 사상적 기반을 추적하는 데 있어 공자 사상에 주목해 『논어』로 사서삼경을 풀이하는 「이한우의 사서삼경」시리즈를 기획, 『논어로 논어를 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 『논어로 대학을 풀다』, 『논어로 맹자를 읽다』를 출간했고, 리더의 입장에서 푼 『논어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조선왕조 ‘제왕학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대학연의』와 조선 후기 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심경부주』를 완역하였다. 또 조선당쟁의 숨은 실력자인 구봉 송익필의 생애와 사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조선의 숨은 왕』, 조선사의 다양한 이면을 다루는 『조선사 진검승부』,『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왕의 하루』,『조선을 통하다』, 고려사의 역동적 보도자료 논어로 일의 이치를 풀다 순간을 담은『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한『슬픈 공자』등도 그간의 연구 성과 중 하나다. 최근에 는『완역 한서』, 『이한우의 주역』을 완역하고,『이한우의 태종실록』시리즈를 통해 군주 의 리더십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 외에도『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한국은 난민촌인가』, 『아부의 즐거움』등을 출간했다. 역서로는『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의미』, 『여성 철학자』 등 역사와 사회철학 분야를 아울러 20여 권이 있다.

본문 중에서

11월 28일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틀이 지난 12월 1일 성종실록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원상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최항 홍윤성 조석문 김질 윤자운 김국광 등이 정희대비를 찾아와 내의(內醫-주치의)와 내시를 국문할 것을 청하는 대목이다.

“어제 염습(斂襲)할 때 대행왕(돌아가신 국왕)의 옥체가 이미 변색이 된 것을 보았는데 훙서한 지가 겨우 2일인데도 이와 같았으니 이것은 반드시 병환이 위독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외인(外人)은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옥체의 변색이라니? 다른 국왕의 경우라면 이것만으로도 당연히 독살설의 유력한 근거로 제기될 만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사실을 고하는 자리에 가장 의심을 살 만한 한명회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 말을 들은 정희대비의 태연함이다. 상식대로라면 옥체의 변색 소식을 들었을 때 친어머니이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노발대발하며 진실을 밝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헌데 오히려 내의나 내시들 편을 드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대행왕이 일찍이 발병을 앓았는데 병이 나으면 반드시 나에게 날마다 세 번씩 조회했으며 병이 발생하면 사람을 시켜 문안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했겠는가? 세조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조그만 질병을 만나면 외인에게 이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까닭으로, 때로 조그만 질병이 생겨도 외인에게 이를 알지 못하게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또 대행왕은 다만 술을 드실 뿐이고 음식을 들지 않았는데 지난 몇 달간 내가 그 병환이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대단치 않은 병이라 여겼는데 어찌 갑자기 대고(大故)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했겠는가? 더구나 내의 등도 또한 일찍이 병세를 나에게 아뢰었으니,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
― <1장 정변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왕위에 오르다> 중에서


성종 1년 6월 5일 원상 김질이 “날씨가 무더우니 하루에 세 번 경연에 나아가는 것은 성체(聖體)를 피로하게 할까 두려우니, 주강을 정지하고 석강에도 편복(평상복)으로 행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고 건의를 했다. 허나 성종은“내가 촌음(寸陰)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할 수가 있겠는가? 또 편복을 입고 신하들을 접견할 수는 없다”고 물리친다. 또 다음해 2월 29일 대왕대비는 편전에서까지 책읽기를 계속하는 성종이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도 돼서 “피로하지 않으오?”라고 묻자 “마음이 저절로 독실하게 좋아하므로 피로한 줄은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답한다. 다른 실록들을 보면 태종의 경우에도 경연을 게을리 할 경우 신하들이 이를 비판하고 실록은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성종의 이런 성실한 공부태도는 조금도 과장이 아닌,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 <2장 임금이 되고서야 학문 수련을 시작하다> 중에서

일부 훈구대신이 젊은 (사림)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 같은 훈구의 일원인 유자광과 임사홍을 유배 보냈다는 것은 세조 때부터 이어져온 훈구공신의 판도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낡은 세력과 새로운 세력의 난상토론을 지켜보면서 의욕 충만한 젊은 정치가 성종이 어느 정도 세력교체의 가능성을 보았을 수도 있고 동시에 서둘러 신진세력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종이 실험한 시도 중의 하나가 이조 예조 병조의 문무 병용 근무제이다. 사냥과 활쏘기 등을 좋아한 것으로 보아 상무(尙武)정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성종은 문약(文弱)을 경계하고 조정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의 하나로 이들 3조에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등용토록 하라고 전지를 내린 바 있다.
성종 9년(1478년) 7월 11일 대사헌 김유 등은 ‘경국대전’을 바꾸지 않고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올렸지만 성종은 무시했다. 그 해 3월 10일 이조와 병조에 내린 지시를 보면 이 무렵 성종의 인재관과 당시 조정의 문제점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볼 수 있다.

“사람을 쓰는 길이 진실로 한 면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사의 가장 큰 핵심은 마땅히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로 하여금 차례를 뛰어 승진하게 하고, 의지가 약한 자는 퇴출케 해야 모든 관료가 각기 그 직무에 적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관사(官司)의 임기가 만료된 자는 물러나는 게 아니라 전례에 따라 모두 승진하거나 다른 자리로 옮기게 되므로, 인원은 많고 자리는 적어서, 어진 이와 어질지 않은 자가 함께 길이 막히게 되어, 사람을 쓰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

― <5장 왕권 강화를 향한 힘겨운 싸움> 중에서


이런 가운데 8월 11일 정말 엉뚱한 자리에서 폐비 윤씨의 문제가 다시 거론된다. 경연에서 시독관 권경우가 우연찮게 윤씨의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자기 말대로 죄를 지어 지방에 가있다가 중앙에 복귀하는 바람에 폐비 윤씨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었다며 별도의 안전한 거처를 마련해주자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중략)

“이미 서인이 되었는데 여염집에 사는 게 무슨 문제인가? 그리고 국모라고 했는가? 어찌 그가 국모인가? 이는 분명코 원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원자(연산군)의 나이는 불과 일곱 살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어쨌거나 성종의 입에서 나온 말 자체는 권경우 한명회 채수 세 사람이 ‘일종의 역모’를 꾸미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의 비판이었다. 순간 경연장에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채수가 적극적인 변명에 나섰다. 성종의 직설적인 성품으로 볼 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채수는 신하들 중에서 가장 나이어린 자신이 34살임을 강조하며 “원자의 세상을 기약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억울함을 펼쳤다.


이에 대해 성종은 “윤씨는 나를 가리켜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며 “원자도 효자가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효자가 되고자 하면 어찌 윤씨를 어미로 여기겠느냐?”고 말한다. 또 예전에 비상을 숨겨둔 것도 경쟁자인 후궁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고 논리적 비약을 한다. 그런데 채수는 만일 여염집에 계속 두어야 한다면 옷과 음식이라고 공급해야 한다고 성종의 심기를 다시 한 번 자극한다.

“그대들은 경연관으로서 나의 뜻을 알 만한데도 그런 식으로 말하니, 그대들은 윤씨의 신하인가 이씨(李氏-성종 자신)의 신하인가?”

― <7장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 중궁 윤씨를 폐하다> 중에서


강무는 산 하나를 완전히 둘러싸야 했기 때문에 동원되는 병사의 숫자도 열무에 못지않았다. 성종은 결국 10월이 되면 자기 뜻대로 강무에 나선다. 10월 2일 궁을 떠나 17일에 돌아온 것으로 보아 경기도 일대를 돌며 장장 보름 동안 사냥을 한 것이다. 너무 강행군을 한 나머지 병사들이 대오를 이탈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창신 등이 도중에 상소를 올려 일정은 느슨하게 잡고 병사들이 제대로 먹어가면서 수행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성종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면서 성종은 보름 동안 사냥을 즐겼다. 여기서 무인기질을 확인하게 되지만 병사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국왕의 모습 또한 읽지 않을 수 없다.
성종 11년에는 이런 저런 일로 해서 사냥에 나서는 일이 뜸했는데 그해 11월 17일 성종이 사냥을 나가겠다고 하자 병조판서 유지가 나서 “지금은 날씨가 몹시 추워 산길이 얼어서 미끄러우니 사냥을 정지하소서”라고 했지만 성종은 “내가 추위를 무릅쓰고 가려고 한다. 경은 따뜻한 방에서 편안하게 앉아 있도록 하라”고 쏘아붙인다. 어쩌면 성종은 그 당시 폐비 윤씨 문제와 새로 중궁을 들이는 문제 등으로 복잡했던 심사를 활쏘기나 사냥을 통해 잊어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10장 무인 기질에 낭만을 좋아한 성종> 중에서


사실 성종은 기질상 격식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 중궁보다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후궁들을 더 가까이 했다. 폐비 윤씨 사건이 터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중궁의 침실은 찾지 않고 귀인 정씨와 엄씨를 더 가까이 한 때문이었다. 결국 정씨와 엄씨는 윤씨의 아들 연산군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연산군 10년 3월 20일 밤 성종이 세운 창경궁 뜰에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이 연산군의 명으로 붙잡혀왔다. 그곳에는 이미 두 여인이 연산군에 의해 무차별 폭행을 당한 채 초죽음이 돼 있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이항과 이봉에게 “이 죄인을 치라”며 몽둥이를 내밀었다. 이항은 무심결에 몽둥이로 두 사람을 쳤으나 이봉은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몽둥이질을 하지 않았다. 이항과 이봉은 귀인 정씨의 아들이었다.

이날 밤은 연산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날이다. 그 자리에서 정씨와 엄씨를 쳐 죽인 연산은 손수 장검을 들고 자순대비(정현왕후 윤씨)의 침전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당장 뜰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아마도 연산의 부인 신씨가 만류하지 않았으면 자순대비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항과 이봉의 머리채를 붙든 연산군은 친할머니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박차고 들어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행패를 부렸다. 그리고 정씨와 엄씨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 젓갈을 담근 다음 산과 들에 뿌렸다. 그리고 안양군과 봉안군은 연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연산의 광기는 끝을 몰랐다.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 후궁이었던 권씨까지 부관참시를 위해 묘를 파헤쳤다. 이유는 권씨가 정씨와 엄씨를 엄호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비구니가 이미 화장을 한 후였다. 이에 화가 난 연산은 권씨의 묘소를 흔적도 없이 뭉개버린다. ― <11장 태평성대의 이면: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에서

추천사

목차

|들어가는 글|신하들이 만들어낸 국왕, 성종

제1장 정변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왕위에 오르다
1. 남이의 옥사
2. 예종의 급사를 둘러싼 의혹
3. 마주보고 달리는 두 기관차, 예종과 훈구
4. 불안정한 권력의 뿌리, 성종의 불안한 앞날

제2장 임금이 되고서야 학문 수련을 시작하다
1. 할머니 정희대왕대비의 지극 정성
2. 경연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성실한 수재

제3장 성종과 한명회의 숙명적인 만남과 갈등
1. 한명회의 나라
2. 패왕(覇王) 세조와 권신(權臣) 한명회
3. 이시애의 난, 세조 정권의 뿌리를 뒤흔들다

제4장 수렴청정하의 성종: ‘사치와 부패의 나라’를 물려받다
1. 부정부패로 물든 훈구(勳舊)의 세상
2. 숙명적 ‘마마보이’ 성종
3. 수렴청정을 끝내고 친정 체제로

제5장 왕권 강화를 향한 힘겨운 싸움
1. 형식상의 전권을 쥐게 되지만
2. 새로운 정치의 모색
3. 제1차 해외 원정:서정(西征)

제6장 왕권을 장악하다
1. 왕실의 존엄을 세우다
2. 왕권 희롱하는 전(前) 장인 한명회를 국문하다
3. 권력의 균형추가 성종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다
4. 멀고 먼 성군(聖君)의 길

제7장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 중궁 윤씨를 폐하다
1. 실패로 끝난 1차 폐비 시도
2. 칠거지악(七去之惡)을 걸어 윤씨를 폐하다
3. 폐비윤씨는 왜 죽어야 했나?

제8장 끝내 뛰어넘지 못한 양대 산맥, 3전과 한명회
1. 3전(殿)에 대한 효심과 국왕으로서의 위신이 충돌하다
2. 2인자의 길:한명회의 노회한 정치술

제9장 세종 대 성종
1.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
2. 세종의 인간주의적 태도, 성종의 남성주의적 태도
3. 이상적인 군주 세종, 인간적인 군주 성종
4. 세종과 양녕, 성종과 비운의 두 왕자

제10장 무인 기질에 낭만을 좋아한 성종
1. 직선적인 성격의 뿌리는 무인 기질
2. 주색잡기에 빠진 낭만의 성종

제11장 태평성대의 이면: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난 연산의 운명
2. 16남 12녀의 아버지 성종
3. 왕실 사람들에 대한 편애

제12장 흉흉한 가운데 38년의 삶을 마감하다
1. 해프닝으로 끝난 단 한 차례 ‘역모’ 사건
2. 무모하게 끝난 북정(北征) 사업
3. 결국 인재도 길러내지 못했다
4. 요동치는 민심을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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