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염습(斂襲)할 때 대행왕(돌아가신 국왕)의 옥체가 이미 변색이 된 것을 보았는데 훙서한 지가 겨우 2일인데도 이와 같았으니 이것은 반드시 병환이 위독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외인(外人)은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옥체의 변색이라니? 다른 국왕의 경우라면 이것만으로도 당연히 독살설의 유력한 근거로 제기될 만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사실을 고하는 자리에 가장 의심을 살 만한 한명회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 말을 들은 정희대비의 태연함이다. 상식대로라면 옥체의 변색 소식을 들었을 때 친어머니이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노발대발하며 진실을 밝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헌데 오히려 내의나 내시들 편을 드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대행왕이 일찍이 발병을 앓았는데 병이 나으면 반드시 나에게 날마다 세 번씩 조회했으며 병이 발생하면 사람을 시켜 문안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했겠는가? 세조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조그만 질병을 만나면 외인에게 이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까닭으로, 때로 조그만 질병이 생겨도 외인에게 이를 알지 못하게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또 대행왕은 다만 술을 드실 뿐이고 음식을 들지 않았는데 지난 몇 달간 내가 그 병환이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대단치 않은 병이라 여겼는데 어찌 갑자기 대고(大故)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했겠는가? 더구나 내의 등도 또한 일찍이 병세를 나에게 아뢰었으니,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
― <1장 정변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왕위에 오르다> 중에서
성종 1년 6월 5일 원상 김질이 “날씨가 무더우니 하루에 세 번 경연에 나아가는 것은 성체(聖體)를 피로하게 할까 두려우니, 주강을 정지하고 석강에도 편복(평상복)으로 행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고 건의를 했다. 허나 성종은“내가 촌음(寸陰)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할 수가 있겠는가? 또 편복을 입고 신하들을 접견할 수는 없다”고 물리친다. 또 다음해 2월 29일 대왕대비는 편전에서까지 책읽기를 계속하는 성종이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도 돼서 “피로하지 않으오?”라고 묻자 “마음이 저절로 독실하게 좋아하므로 피로한 줄은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답한다. 다른 실록들을 보면 태종의 경우에도 경연을 게을리 할 경우 신하들이 이를 비판하고 실록은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성종의 이런 성실한 공부태도는 조금도 과장이 아닌,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 <2장 임금이 되고서야 학문 수련을 시작하다> 중에서
일부 훈구대신이 젊은 (사림)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 같은 훈구의 일원인 유자광과 임사홍을 유배 보냈다는 것은 세조 때부터 이어져온 훈구공신의 판도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낡은 세력과 새로운 세력의 난상토론을 지켜보면서 의욕 충만한 젊은 정치가 성종이 어느 정도 세력교체의 가능성을 보았을 수도 있고 동시에 서둘러 신진세력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종이 실험한 시도 중의 하나가 이조 예조 병조의 문무 병용 근무제이다. 사냥과 활쏘기 등을 좋아한 것으로 보아 상무(尙武)정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성종은 문약(文弱)을 경계하고 조정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의 하나로 이들 3조에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등용토록 하라고 전지를 내린 바 있다.
성종 9년(1478년) 7월 11일 대사헌 김유 등은 ‘경국대전’을 바꾸지 않고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올렸지만 성종은 무시했다. 그 해 3월 10일 이조와 병조에 내린 지시를 보면 이 무렵 성종의 인재관과 당시 조정의 문제점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볼 수 있다.
“사람을 쓰는 길이 진실로 한 면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사의 가장 큰 핵심은 마땅히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로 하여금 차례를 뛰어 승진하게 하고, 의지가 약한 자는 퇴출케 해야 모든 관료가 각기 그 직무에 적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관사(官司)의 임기가 만료된 자는 물러나는 게 아니라 전례에 따라 모두 승진하거나 다른 자리로 옮기게 되므로, 인원은 많고 자리는 적어서, 어진 이와 어질지 않은 자가 함께 길이 막히게 되어, 사람을 쓰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
― <5장 왕권 강화를 향한 힘겨운 싸움> 중에서
이런 가운데 8월 11일 정말 엉뚱한 자리에서 폐비 윤씨의 문제가 다시 거론된다. 경연에서 시독관 권경우가 우연찮게 윤씨의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자기 말대로 죄를 지어 지방에 가있다가 중앙에 복귀하는 바람에 폐비 윤씨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었다며 별도의 안전한 거처를 마련해주자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중략)
“이미 서인이 되었는데 여염집에 사는 게 무슨 문제인가? 그리고 국모라고 했는가? 어찌 그가 국모인가? 이는 분명코 원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원자(연산군)의 나이는 불과 일곱 살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어쨌거나 성종의 입에서 나온 말 자체는 권경우 한명회 채수 세 사람이 ‘일종의 역모’를 꾸미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의 비판이었다. 순간 경연장에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채수가 적극적인 변명에 나섰다. 성종의 직설적인 성품으로 볼 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채수는 신하들 중에서 가장 나이어린 자신이 34살임을 강조하며 “원자의 세상을 기약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억울함을 펼쳤다.
이에 대해 성종은 “윤씨는 나를 가리켜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며 “원자도 효자가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효자가 되고자 하면 어찌 윤씨를 어미로 여기겠느냐?”고 말한다. 또 예전에 비상을 숨겨둔 것도 경쟁자인 후궁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고 논리적 비약을 한다. 그런데 채수는 만일 여염집에 계속 두어야 한다면 옷과 음식이라고 공급해야 한다고 성종의 심기를 다시 한 번 자극한다.
“그대들은 경연관으로서 나의 뜻을 알 만한데도 그런 식으로 말하니, 그대들은 윤씨의 신하인가 이씨(李氏-성종 자신)의 신하인가?”
― <7장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 중궁 윤씨를 폐하다> 중에서
강무는 산 하나를 완전히 둘러싸야 했기 때문에 동원되는 병사의 숫자도 열무에 못지않았다. 성종은 결국 10월이 되면 자기 뜻대로 강무에 나선다. 10월 2일 궁을 떠나 17일에 돌아온 것으로 보아 경기도 일대를 돌며 장장 보름 동안 사냥을 한 것이다. 너무 강행군을 한 나머지 병사들이 대오를 이탈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창신 등이 도중에 상소를 올려 일정은 느슨하게 잡고 병사들이 제대로 먹어가면서 수행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성종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면서 성종은 보름 동안 사냥을 즐겼다. 여기서 무인기질을 확인하게 되지만 병사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국왕의 모습 또한 읽지 않을 수 없다.
성종 11년에는 이런 저런 일로 해서 사냥에 나서는 일이 뜸했는데 그해 11월 17일 성종이 사냥을 나가겠다고 하자 병조판서 유지가 나서 “지금은 날씨가 몹시 추워 산길이 얼어서 미끄러우니 사냥을 정지하소서”라고 했지만 성종은 “내가 추위를 무릅쓰고 가려고 한다. 경은 따뜻한 방에서 편안하게 앉아 있도록 하라”고 쏘아붙인다. 어쩌면 성종은 그 당시 폐비 윤씨 문제와 새로 중궁을 들이는 문제 등으로 복잡했던 심사를 활쏘기나 사냥을 통해 잊어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10장 무인 기질에 낭만을 좋아한 성종> 중에서
사실 성종은 기질상 격식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 중궁보다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후궁들을 더 가까이 했다. 폐비 윤씨 사건이 터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중궁의 침실은 찾지 않고 귀인 정씨와 엄씨를 더 가까이 한 때문이었다. 결국 정씨와 엄씨는 윤씨의 아들 연산군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연산군 10년 3월 20일 밤 성종이 세운 창경궁 뜰에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이 연산군의 명으로 붙잡혀왔다. 그곳에는 이미 두 여인이 연산군에 의해 무차별 폭행을 당한 채 초죽음이 돼 있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이항과 이봉에게 “이 죄인을 치라”며 몽둥이를 내밀었다. 이항은 무심결에 몽둥이로 두 사람을 쳤으나 이봉은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몽둥이질을 하지 않았다. 이항과 이봉은 귀인 정씨의 아들이었다.
이날 밤은 연산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날이다. 그 자리에서 정씨와 엄씨를 쳐 죽인 연산은 손수 장검을 들고 자순대비(정현왕후 윤씨)의 침전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당장 뜰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아마도 연산의 부인 신씨가 만류하지 않았으면 자순대비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항과 이봉의 머리채를 붙든 연산군은 친할머니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박차고 들어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행패를 부렸다. 그리고 정씨와 엄씨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 젓갈을 담근 다음 산과 들에 뿌렸다. 그리고 안양군과 봉안군은 연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연산의 광기는 끝을 몰랐다.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 후궁이었던 권씨까지 부관참시를 위해 묘를 파헤쳤다. 이유는 권씨가 정씨와 엄씨를 엄호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비구니가 이미 화장을 한 후였다. 이에 화가 난 연산은 권씨의 묘소를 흔적도 없이 뭉개버린다. ― <11장 태평성대의 이면: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