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즉위하는 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하고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첫 번째로 취한 가시적 조치는 영조의 장례를 위해 설치한 빈전도감·국장도감·산릉도감을 책임지는 총호사 신회를 즉위 열흘 만인 3월 19일 파직한 것이다.
바로 다음날 정조는 할아버지보다는 아버지 쪽으로 방향을 잡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라도 하듯이 할아버지의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올려 ‘장헌(莊獻)’이라 하고,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수은묘의 봉호(封號)를 ‘영우원(永祐園)’,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바꿨다. 격을 한 단계 높이려는 것이었다.
정조는 서둘렀다. 3월 23일 사헌부 대사헌으로 전격 임명한 이계의 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 3월 25일 정후겸을 함경도 경원으로, 추종세력인 윤양후와 윤태연을 각각 경상도 거제도와 전라도 위도로 귀양 조치했다. 당초 이계는 정후겸을 비롯해 화완옹주와 핵심 추종세력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정조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속도조절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공손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때라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정후겸은 멀리 귀양 보내고 옹주는 이미 사제(私第-궁궐 밖의 집)로 나갔으므로 논할 것이 없다.”
― <2장 과거청산, 보복의 칼을 휘두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