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주축이 되어 현재의 체코와 북부 이탈리아를 포괄하는 대독일주의와 북부 독일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가 대립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은 소독일주의 노선에 따른 것이었고 현실적인 방안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레알폴리티크(Realpolitik-현실주의 정치)’라는 말이 탄생했다.
반면 국민 정서로 볼 때 가장 호소력이 컸던 대독일주의는 결국 20세기 들어 히틀러식으로 구체화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를 일으키고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대독일은 커녕 분단독일로 귀착되었다.
물론 19세기 독일의 현실이 14세기 말~15세기 초의 조선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 그 밑바탕에는 어떤 조선을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처절한 세계관 투쟁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은 개인간의 권력투쟁을 넘어선, 향후 조선 500년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대한 대립이었다. 정도전은 아이디얼리스트였고 이방원은 레알폴리티크의 신봉자였다. 대(大)조선과 소(小)조선의 대립이었다.
― <4장 울분을 삭이며 보내야 했던 태조 시대 7년> 중에서
정안공 이방원은 남경으로 가던 도중 북경에서 주원장의 아들인 연왕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연왕을 만나본 후 이방원은 함께 갔던 사람들에게 “연왕은 왕으로 머물러 있을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평소에도 “말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온 이방원이었다.
실제로 4년 후인 1398년 명 태조 주원장이 사망하자 7년 전에 죽은 황태자 대신 황손인 명 혜제가 즉위하지만 얼마 후 연왕은 형제, 조카들과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른 끝에 황제의 자리를 쟁취했다. 이를 중국사에서는 ‘정난(靖難)의 역(役)’이라고 부른다. 무력을 통한 권력 쟁취라는 면에서는 영락제와 태종의 관계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권력 투쟁에서 첩보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활용했던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하필이면 이방원의 칭호도 ‘난을 진압해 평안을 이룬다’는 뜻의 정안(靖安) 아닌가.
이런 점들을 떠나서라도 정안공 이방원이 두 차례나 명나라 금릉을 다녀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직접 명나라와 조선의 실상을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영토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을 갖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세계에 대한 열린 시야를 갖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또 요동을 둘러싼 국제 역학 관계에 대한 나름의 정확한 인식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위험을 감수한 두 차례의 금릉행은 훗날 태종에게 외교·군사적으로 중요한 자산이 된다.
― <4장 울분을 삭이며 보내야 했던 태조 시대 7년> 중에서
태종은 『대학연의』의 진강을 끝낸 후 김과를 불러 “이 글을 다 읽으니, 이제야 학문의 공(功)을 알겠다”고 흡족해한다. 이 소식에 경연에 참석했던 신하들이 대궐에 몰려와 축하 인사를 하겠다고 하자 태종은 물리친다. 매사에 허례허식이나 과공을 꺼렸던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가 익히 읽어서 능히 행하기를 기다린 후에 하례하라. 다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례할 것은 못 된다.”
『대학연의』가 제왕학으로서 결정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단순히 탁월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실천을 강조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태종이 “행하기를 기다린 후에 하례하라”고 한 것은 이 책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선 국왕들이 신하들에게서 들어야 했던 이야기는 ‘하루이틀 사이에 만기(萬機)가 일어날 수 있으니 삼가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였다. 요즘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면, 지도자의 머릿속에는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기에 그중 어떤 생각을 골라내 실천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뀔 수 있으니 사전에 훈련을 통해 그런 생각들을 현실에서 구체화하고 의미 있는 일들을 추려내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훈련에 『대학연의』처럼 경과 사, 오늘날의 철학과 역사, 사회과학이 절묘하게 종합되어 있는 책은 효과적일 수 있었다. 태종이 학문의 공을 알았다고 말한 것도 학문의 실천 지향성을 이해했다는 말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 <7장 태종 18년을 곁에서 지킨 대학연의> 중에서
『실록』은 청년 이방원에 대해 “결연히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어, 능히 몸을 굽히어 선비들에게 겸손하였다”고 적고 있다. 권력욕의 화신이라기보다는 무너져내리는 고려 말 백성들의 삶에 대한 청년 지식인으로서의 분노가 있었고 정치를 통해 이를 바로잡아보겠다는 열정이 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