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지옥인 거대한 난파선에서
시의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하기를 바라며
내 마음이 지옥일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덕목이 자기 탓이다. 자기 탓은 상황을 중립적,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다. 상황이 모호하거나 가해자를 분명하게 적시할 수 없는 경우, 상황이 분명해도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나 성찰을 치열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 가장 손쉽고 게으르게 할 수 있는 분석이 ‘자기 탓’이다. 얼핏 도덕적 성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자기 탓으로 돌리는 일을 미덕이라고 칭송하거나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있다. 어떤 이가 지옥 같은 고통에 빠졌을 때 제3자 입장에서 나라면 절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자기비난이나 단죄를 비슷한 경우의 자신에게는 거침없이 한다. 때론 타인(혹은 가해자나 방관자)보다 나를 더 지옥으로 내모는 것이 ‘나만 탓하는 나’다.
― <2. 기승전 ‘내 탓’ 금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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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돋는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봐요.
등에 업혀서 자장가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들던 때의 나를 떠올리면
내가 더 어떻게 사랑스럽겠어요.
내가 천하무적이던 시절이에요.
다치고 취해서 무방비인 상태일 때 업히려면
몸무게가 적당해야 해서 그게 걱정이지
내가 마음놓고 업힐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자기 등에 여자 가슴을 밀착시키기 위해서
모터사이클 속도를 높이는 가죽잠바 오빠는 하수예요.
그건 업는 게 아니에요. 내리면 끝나는 관계예요.
돌에 걸려 넘어지고 물에 빠졌을 때
업어주는 사람이 진짜예요. ― <3. 무조건적인 내 편, 꼭 한 사람> 중에서
살다 보면 어깨 위에 산 전체를 걸머지는 고통과 벼락처럼 마주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믿었던 관계가 깨지고 곤두박질하듯 무일푼 신세가 된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힘에 겨워 무릎이 꺾여 넘어진다. 그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같다. 일어나는 방법을 잊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다시 일어나고 어떻게 걸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살고 싶어서다.
트라우마 현장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치유자 정혜신의 처방은 간명하다. 걱정할 거 없다. 지금 일어설 수 없으면 일어서려 하지 않아도 된다. 더 주저앉아 있어도 된다. 꺾였을 때는 더 걸으면 안 될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그걸 인정해 줘야 한다. 충분히 쉬고 나면 저절로 걷게 된다. 당신은 원래 스스로의 다리로 걸었던 사람이다. 그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모든 인간의 어린 시절 ‘나’는 온전한 나, 치유적으로 건강한 나의 원형이다. 나는 본래 그렇게 사랑스런, 사랑받아 마땅한 혹은 사랑받았던 사람이다. 절대적으로 괜찮은 존재였다.
― <4. 나는 원래 스스로 걸었던 사람이다> 중에서